<다큐3일> '처음 만난 세계 – 이천 SK하이닉스 72시간'
화려한 숫자 너머 방진복을입고 24시간 팹을 지키는 사람들
0.1% 개선과 나노 단위 검증이 쌓여 만든 일류 HBM 경쟁력
실패를 견딘 현장과 원팀의 시간이 AI 반도체 시대를 열다
ⓒKBS 다큐멘터리 3일
SK하이닉스의 HBM 신화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성공담이 아니다. 11일 KBS 2TV '다큐멘터리 3일'의 '처음 만난 세계 – 이천 SK하이닉스 72시간'편이 따라간 것은 주가와 실적 그래프가 아니라, 그 숫자 뒤에서 매일 같은 시간 출근해 방진복을 입고 장비 앞에 서는 사람들의 72시간이었다.
이천캠퍼스는 매일 3만 명이 오가는 거대한 반도체 도시다. 포토 기술 전략, DRAM 불량 분석, 프로브 카드 개발, 테스트 장비 인터페이스 개발 등 각기 다른 업무를 맡은 구성원들이 사원증을 찍고 각자의 공정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이 공장이 써 내려갈 다음 숫자를 기다리지만, 그 숫자는 결국 이들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방진복을 입고 들어간 반도체의 심장부
ⓒKBS 다큐멘터리 3일
반도체 생산 공장인 팹(Fab, Fabrication Facility)은 외부에 쉽게 공개되지 않는 철통 보안의 공간이다. 정전기와 먼지가 웨이퍼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진복 착용과 장비 세척, 에어샤워를 거쳐야 한다.
첫발을 들이면 실내라고 믿기 어려운 광활한 공간이 펼쳐진다. 축구장 8개 면적, 아파트 37층 높이에 달하는 팹 안에서는 오버헤드 호이스트 트랜스포트(Overhead Hoist Transport, OHT)가 천장 레일을 따라 움직이고 전방개구식 통합 포드(Front Opening Unified Pod, FOUP)에 담긴 웨이퍼를 24시간 실어 나른다.
FOUP 하나에는 웨이퍼 25장이 들어간다. 현장에서는 웨이퍼 한 장을 고가의 자동차 한 대에 비유할 정도로 그 가치를 무겁게 다룬다. 그러나 겉으로는 기계가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장비를 점검하고 부품을 교체하며 공정 이상을 잡아내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반도체 하나가 완성되기까지는 최소 4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수백 개 공정과 계측, 검증이 반복되고, 손톱보다 작은 칩 하나 안에 긴 제조의 시간이 촘촘히 들어간다.
0.1%를 놓치지 않는 현장의 치열함
HBM 경쟁력은 거대한 기술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장에서는 0.1%라도 더 생산할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위해 물류 라인의 병목을 살피고 장비 흐름을 조정하며, 작은 개선 가능성을 끝까지 추적한다. 구성원들은 이를 ‘이삭줍기’에 비유한다.
클린룸이라고 먼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의자와 카트, 작은 부품에서도 먼지가 생길 수 있어 청소 담당 구성원들은 특수 도구로 장비 주변을 관리한다. 하루 1만5000보 가까이 걸으며 현장을 정돈하는 손길이 지나간 뒤에야 공장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후공정 팹은 반도체의 시험대이자 출구다. 패키징을 마친 제품에는 일부러 강한 열과 전기를 가해 미래의 불량 가능성까지 미리 찾아낸다. 한 테스트 엔지니어는 자신의 일을 “반도체 의사”라고 표현한다. 백여 가지 테스트를 통과해야 비로소 반도체는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다.
한 꺼풀씩 갈아본 HBM의 작은 세계
분석실은 HBM 신화의 또 다른 무대다. 이곳에서는 품질과 수율을 높이기 위해 반도체를 해부하듯 자르고 쪼갠 뒤 들여다본다. HBM은 층이 촘촘히 쌓인 구조여서 한 꺼풀씩 연마해 내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까다롭다.
한 구성원은 HBM 분석 과정을 아파트에 비유한다. 1층부터 30층까지 있는 건물이라면 30층을 갈아내서 보고, 다시 29층을 갈아내서 보는 방식이다. 조금만 과하게 갈려도 원하는 단면을 놓칠 수 있어 분석 과정 자체가 고도의 숙련을 요구한다.
사람 키보다 큰 현미경 장비는 가장 작은 세계를 보기 위해 쓰인다. 1000만배, 1억배까지 확대해 소자가 설계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미세한 층 사이에서 불량의 원인을 찾아낸다. 300mm 웨이퍼 안에는 1조 개가 넘는 소자가 촘촘히 들어가고 구성원들은 이를 “1조 개 이상의 빌딩”에 비유한다.
현미경 화면을 보던 구성원들은 또렷하게 구현된 단면을 두고 “예쁘다”고 말한다. 나노 단위의 일을 “신의 영역”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안에서 아름다움과 보람을 발견하는 사람들. HBM 신화는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 현장의 감각 위에 서 있었다.
실패를 감수하고 먼저 해본 사람들
ⓒKBS 다큐멘터리 3일
HBM의 성과는 시장이 주목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아무도 HBM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시기부터 기술을 차근차근 쌓아왔고, 침체기에도 시제품 공급을 위해 납기 소요시간(Turn Around Time, TAT)을 과감히 앞당긴 경험이 오늘의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한 구성원은 “남들이 안 하는 걸 저희 회사는 먼저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실패할 때도 있겠지만, 어쨌든 안 하는 것보다 우선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정답이 보장되지 않은 영역에서 먼저 시도하고 실패를 경험으로 바꾼 시간이 HBM의 토대가 됐다는 의미다.
HBM은 일반 메모리 반도체가 일차선 도로라면 수천 차선의 고속도로와 같은 기술로 소개된다. 그 고속도로를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번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축적해온 기술과 고객 요구에 맞춰 움직인 현장의 결단이었다.
평범한 얼굴들이 만든 특별한 성과
이번 편이 보여준 사람들은 특별한 영웅이라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래 버틴 평범한 구성원들이었다. 입사 2주 차 신입은 먼지가 나지 않는 특수용지 수첩에 모르는 것을 적어가며 선배들을 따라다닌다. 입사 10개월 차 구성원은 아직도 집에 입사 축하 꽃을 간직하고 있다며, 오랫동안 꿈꾸던 엔지니어의 길을 시작한 마음을 전한다.
책상 위에 감자 모형을 올려둔 4년 차 엔지니어도 있다. 입사 초기 할 줄 아는 일이 없어 스스로를 감자 같다고 느꼈지만, 그 감자를 보며 “저거보다 낫지”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는 또 터널이 오더라도 지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19살에 전남 화순에서 올라와 같은 공정에서 일해온 쌍둥이 자매는 무급휴직과 전력 절감의 시간을 견디며 현장을 지켜왔다. HBM의 시작을 함께한 최고참 엔지니어는 최첨단 회사의 책상 위에 여전히 주판을 두고 있다. 그는 “확신하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희망은 놓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원팀의 시간이 일류를 만든다
이천캠퍼스의 원팀 문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에서 드러난다. 출근길에 만난 한 구성원은 많은 사람이 함께 오가니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조그마한 반도체 하나가 수많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듯, 자신도 그 안의 작은 존재이지만 모두가 모여 하나를 만든다는 설명이다.
누군가는 장비를 보고, 누군가는 공정을 관리하고, 누군가는 불량을 찾고, 누군가는 클린룸을 정돈한다. 누군가의 하루가 끝나면 다른 누군가의 하루가 시작된다. 24시간 멈추지 않는 팹은 이렇게 이어지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움직인다.
이번 편의 내레이션은 '다큐멘터리 3일'의 대표 목소리로 알려진 가수 유열이 맡았다. HBM 신화는 차가운 숫자와 기술 용어만으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먼지 한 톨을 줄이는 손길, 0.1%를 찾는 집요함, 실패를 감수한 도전, 서로의 역할을 믿고 이어가는 원팀의 시간이 SK하이닉스의 일류 반도체 경쟁력으로 축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KBS 다큐멘터리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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