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록·박세영·김미조, 저마다 다른 장르와 미감으로 존재감
최근 한국영화에서 익숙한 장르와 서사의 문법을 비트는 신예 감독들의 작품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한창록 감독의 '충충충'은 동시대 10대의 불안과 충동을 거칠게 밀어붙이고, 박세영 감독의 '지느러미'는 디스토피아 SF 안에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끌어들였다. 김미조 감독의 '경주기행'은 가족 복수극에 유머를 섞었다. 작품의 규모와 장르는 다르지만 기존 한국영화에서 쉽게 보기 어려웠던 소재와 표현 방식을 앞세워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충충충'·'지느러미'·'경주기행' 포스터ⓒ㈜엣나인필름· ㈜에무필름즈· 롯데엔터테인먼트
지난 6월 17일 개봉한 '충충충'은 한창록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세상의 관심을 갈구하는 고등학생 용기가 오랜 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인 지숙을 위해 그의 전 남자친구에게 복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제목은 '충동', '충돌', '충격'에서 한 글자씩 가져왔다.
한 감독은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외모 강박 등 청소년을 둘러싼 문제를 정돈된 사회극의 문법으로 설명하기보다 인물들의 충동과 감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불안정한 화면과 강렬한 음악, 세기말적인 분위기의 미장센을 뒤섞어 10대들이 겪는 불안과 고립을 날것에 가까운 에너지로 표현했다.
장편 데뷔작이지만 영화제에서 일찌감치 존재감을 드러냈다. '충충충'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어워드 심사위원특별상과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을 수상했으며, 무주산골영화제 한국장편영화경쟁 '창' 섹션에서는 감독상을 받았다. 홍콩국제영화제와 타이베이영화제, 영국 SXSW London 등 해외 영화제 초청도 이어졌다. 단편 시절부터 국내외 영화제를 거쳐온 한 감독이 첫 장편에서도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이어간 셈이다.
한 감독이 현실의 청춘을 거친 이미지와 에너지로 포착했다면 박세영 감독은 근미래로 무대를 옮겼다. 지난달 22일 국내 개봉한 '지느러미'는 유전적 돌연변이 '오메가'와 인간이 공존하는 근미래 통일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SF다.
'다섯 번째 흉추'에 이은 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에서도 전작에서 보여준 독특한 장르 감각은 이어진다. 영화는 인간과 다른 신체를 가진 오메가를 통해 특정 집단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차별과 혐오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적인 사회극으로 풀기보다 디스토피아와 SF, 과감한 색감과 미장센을 결합해 낯선 세계로 옮겨놓는다.
'지느러미'의 독특한 장르 감각은 해외 영화제로도 이어졌다. '지느러미'는 제78회 로카르노영화제 신인 감독 경쟁부문인 '오늘의 영화감독'(Filmmakers of the Present) 섹션에 공식 초청됐다. 국내 개봉에 앞서 프랑스에서 먼저 개봉했으며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해 유럽과 아시아,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순차적으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북미 배급은 아시아 영화 전문 부티크 배급사 카니 릴리징(Kani Releasing)이 맡았다. 신진 감독들의 독창적인 작품과 새롭게 평가받는 아시아 영화를 소개해온 곳으로, 한국 독립영화가 현지 배급사를 통해 북미 관객과 만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한국·독일·카타르 공동제작으로 완성된 작품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한반도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출발하면서도 양극화와 분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이야기를 확장했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김미조 감독의 '경주기행'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장르의 폭을 넓힌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딸 경주를 위해 8년의 기다림 끝에 여행을 떠나는 엄마와 세 딸의 가족 복수극이다. 이정은이 엄마 옥실을, 공효진·박소담·이연이 세 딸 장주·영주·동주를 연기했다.
'경주기행'은 김 감독이 장편 데뷔작 '갈매기' 이후 내놓은 두 번째 장편이자 첫 상업영화다. '갈매기'가 중년 여성의 성폭력 피해와 그 이후의 삶을 가족 관계 안에서 들여다봤다면, '경주기행'에서는 상실과 가족이라는 관심사를 복수극이라는 보다 대중적인 장르 안으로 옮겼다.
특히 복수라는 무거운 소재를 시종 비장하게 끌고 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막내딸을 잃은 가족의 상실감과 분노를 중심에 두면서도 예상 밖의 상황과 모녀의 관계성으로 블랙코미디를 끌어안았다. 웃음과 긴장, 슬픔이 교차하면서 전형적인 복수극과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낸다.
독립영화에서 출발한 감독이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등 대중에게 익숙한 배우들과 상업영화의 규모 안에서 작업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김 감독은 제작 규모와 캐스팅은 달라졌지만 전작에서 이어온 여성과 가족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으면서 자신의 색깔과 대중적인 장르 사이의 접점을 찾았다.
개봉에 앞서 영화제에서도 관객과 만났다. '경주기행'은 제45회 하와이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됐으며, 제24회 피렌체 한국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받았다. 국내에선 언론배급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후 호평을 받고 있다.
세 감독이 택한 소재와 장르는 제각각이지만 기존의 익숙한 방식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맞닿아 있다. 한창록 감독은 청소년의 불안을 거친 에너지와 미장센으로 밀어붙였고, 박세영 감독은 차별과 혐오를 디스토피아 SF의 세계로 옮겼다. 김미조 감독은 상실과 가족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크 유머가 섞인 복수극으로 변주했다.
한국영화가 관객 감소와 제작 위축을 겪으면서 검증된 감독과 익숙한 장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새로운 감독들의 등장은 반가운 신호다. 아직 이들의 활약을 세대교체라는 말로 묶기에는 이르지만, 서로 다른 소재와 장르, 미감을 지닌 영화들이 잇따라 극장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영화의 선택지는 넓어진다. 이들이 보여준 새로운 색깔이 한 편의 성과에 그치지 않고 다음 작품으로 이어진다면 한국영화의 장르와 이야기 역시 한층 다양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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