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예술을 넘어, 관객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는 무대 [기록하는 팬덤①]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6.18 14:00  수정 2026.06.18 14:00

인스타툰·수제 인형·커스텀 키링 등 ‘2차 창작’ 문화 확산

모바일·SNS에 능숙한 2030 여성이 트렌드 주도

“제 손으로 극의 한 조각을 직접 만들고 조립할 때, 비로소 그 공연이 진짜 ‘내 것’이 된 기분이 들어요.”


무대 위 배우 의상을 그대로 본뜬 손바닥만 한 솜인형 옷, 주요 대사를 정성껏 받아 적은 캘리그래피, 공연의 상징적인 오브제를 형상화한 수공예 키링까지. 요즘 연극·뮤지컬 팬들의 가방과 SNS 피드를 가득 채운 이 다채로운 ‘기록물’의 제작자는 기획사가 아닌 ‘관객’이다. 찰나의 순간을 붙잡아 개인의 영역에 영원히 보존하려는 욕구가 개인 제작 문턱의 하락과 맞물리며,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 고차원적인 ‘2차 창작’으로 진화한 것이다.


공연리뷰어 분더비니가 지난해 1년간 쓴 '관극 일기' 다이어리(왼쪽)와 2025년 진행한 관극 다이어리 기록 모임 사진 ⓒ분더비니

이러한 아카이빙 트렌드는 온라인을 통한 정보 수집과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한 핵심 관객층이 주도하고 있다. 주로 20~30대 여성이다. 실제 국내 공연 시장의 주 소비층을 분석한 데이터에서 드러난 생산 행위의 주체는 이를 뒷받침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지난해 발표한 ‘공연예술통합전산망 관객 세분화 연구’에 따르면, 국내 공연 시장은 여성이 73.2%, 남성이 26.8%로 여성이 남성과 비교해 약 2.7배 이상 높은 압도적인 성별 우위 구조를 보인다. 연령대별로는 20대(29.9%), 30대(27.4%), 40대(27.2%)가 전체의 84.5%를 구성하며 핵심 수요층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이들 관객층은 모바일 이용 행태에서 월평균 메신저 앱 사용 226.4일, SNS 앱 사용 144일이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할 만큼 디지털 소통과 아카이빙, 콘텐츠 재생산에 최적화된 성향을 띤다.


흥미롭게도 온라인 소통에 능숙한 고관여 관객들 성향은 극장 밖에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성’을 지닌 아카이빙 문화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최근 무대 밖에서 활자의 한계를 넘어선 물리적 기록물의 생산과 확산이 본격화하는데, 대표적인 현상이 ‘티켓북 꾸미기(다꾸)’다. 관객들은 관람 공연 티켓을 단순히 모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티켓북의 여백을 극의 분위기에 맞는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점토 등으로 디자인한다. 작품의 주요 대사를 적어 넣거나 프로그램북 이미지를 활용해 관람 당시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이다.


더해 극 중 무대 장치나 소품 등 핵심 오브제를 모티프로 삼은 커스텀 키링 제작도 활발하다. 관객들은 작품의 상징적인 아이템인 꽃, 편지, 열쇠 등을 레진 공예나 비즈를 활용해 직접 구현하며 극의 여운을 물리적 형태로 간직한다.


좋아하는 배우나 캐릭터를 본뜬 솜인형에 실제 무대 의상을 그대로 재현해 입히는 DIY 문화 역시 팬덤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무대 의상의 색감, 원단, 단추 위치 등 세부 디테일을 정교하게 복제해 인형 옷을 제작하고, 이를 극장에 지참해 객석이나 캐스팅 보드 앞에서 인증 사진을 촬영한다. 이러한 행위는 형태가 없는 공연의 기억을 일상의 공간으로 확장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소장하려는 관객들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해석된다.


공연 리뷰어 분더비니는 “무대는 막이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그 순간 극장에서 느낀 감각만큼은 내 삶의 한 조각으로 붙잡아두고 싶었다”며 “활자를 넘어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휘발되는 기억을 손에 잡히는 실체로 만드는 관객 나름의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과 디지털 공간에서의 재생산 활동 역시 한층 정교해지고 있다. 관극 과정에서 겪는 소소한 에피소드나 티켓팅 과정의 애환을 캐릭터와 대사로 풀어낸 인스타툰이 대표적이다. 또한 특정 작품의 세계관이나 캐릭터의 심리 변화, 배우별 연기 노선의 미세한 차이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비공식 아카이브집과 분석 자료가 SNS와 전용 커뮤니티를 통해 활발히 공유된다.


이러한 디지털 콘텐츠들은 전문가의 평론과는 다른 차원에서 동료 관객들의 깊은 공감대를 자아낸다. 관객들은 스스로 만든 콘텐츠를 매개로 소통하며, 극장 밖에서도 작품의 세계관을 일상 속으로 끌고 와 지속해서 소비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뮤연성' SNS

촉각과 실물을 활용해 극 중 캐릭터를 일상으로 확장하는 이들도 있다. 캐릭터의 의상과 소품을 그대로 축소해 인형으로 만들거나, 작품의 특징을 압축해 담은 키링을 제작하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다이어리 꾸미기(다꾸), 자체 MD 제작 등 다채로운 콘텐츠를 올리고 있는 ‘뮤연성(뮤지컬 덕질 아티스트)’이 대표적인 예다.


뮤연성은 무대 위의 순간들을 자신만의 감각적인 시각 예술로 박제하며 연뮤덕(연극·뮤지컬 팬덤) 사이에서 거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눈으로만 읽는 평론 대신 극의 메시지를 담은 키링을 직접 만들거나, 당일 회차의 감동을 다이어리 한 페이지에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는 식이다.


예술경영을 전공한 A씨는 “이제 관극은 객석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는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라며 “공연을 보기 전 정보를 탐색하는 과정부터 관람 후 극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다각적인 기록과 창작 행위까지의 전 과정이 하나의 완전한 관람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고 진단했다.


이어 “관객들은 스스로 창작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작품의 가치를 재생산하고, 이를 통해 취미를 공유하는 이들과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결국 현대 공연 팬덤에게 기록이란 휘발되는 예술에 저항하는 방식이자 작품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최종적인 절차이며, 이러한 자발적인 생산 활동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공연 산업 전반의 생태계와 시장의 자생력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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