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사적 복수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입력 2012.12.02 09:57  수정 2013.05.22 14:47

<김헌식 칼럼>대선 정국 겨냥 우후죽순…사회 질서 무너질까 우려도

영화 '돈 크라이 마미' 포스터.
영화 <그을린 사랑>에서 주인공은 기독교인과 회교도 사이에서 벌어진 복수극의 와중에 살아남는다. 두 종교 세력은 자신이 옳다고 밝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입장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신념은 결국 사적 복수의 악순환을 불렀다. 그녀도 사적인 복수를 감행해 상대편 지도자를 살해한다. 상대편은 다시 그녀에게 복수를 감행했고 그것은 인륜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결과를 낳고만다.

사적인 복수를 다룬 영화가 계속 연이어 대중 흥행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한꺼번에 7, 8개의 작품이 쏟아지는 것은 이례적이다. 대선의 정국에 겨냥했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회적 정책적 아젠다를 공론화하는 것이 대통령 선거 경쟁 마당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특성상 사적 복수는 명확한 선악 구도를 지니고 있어 관객들의 몰입을 최대한 끌어 모을 수 있다. 복수를 하는 사람과 복수의 대상자가 뚜렷할수록 이를 보는 이들은 몰입을 더 하게 된다. 여기에서 복구하는 이들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이다. 상대가 강할수록 그 상대로 인한 억울함이나 상처 때문에 복수의 정당성은 커진다.

이런 맥락의 사회문화적인 심리가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약자의 복수 심리가 강하다. 한국에서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시민들이 자신들은 약자라고 생각한다. 부자이거나 권력자이어도 자신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로 간주한다. 이는 언더도그마 현상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즉 약자는 배려하고 보호해야 하는 의식이 문화에 강할수록 사람들은 약자이기를 원한다. 그만큼 약자는 강자에게 당하는 정도가 심했던 때문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결합하면서 제도와 법은 약자를 더 우선해야 바람직한 것이라는 인식을 낳게 되었다.

경찰과 검찰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이른바 공권력 부정을 표방하는 사적 복수는 약자 즉 서민들의 대리표출이자 만족이다. 진정으로 복수를 하려는 것보다는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을 담는다.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지만 사적복수 영화는 힐링의 시네마가 된다. 일상적으로 복수하고 싶은 사안이나 대상은 많겠지만 그것을 실제 실행하는 경우는 끔찍하다.

그것을 영화를 통해 대리배설하거나 산화시켜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사적 복수영화는 그냥 영화관 안에서만 배설하거나 대리 분출하는 선에서만 머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과격하거나 선정적이라고 해도 현실의 제도를 바꾸려는 아젠다 세팅 방식을 구가하고 있다.

영화 <도가니>를 통해 도가니법이 만들어진 것은 아동과 장애인에 대한 법적 제도적인 장치가 미비했음을 의미했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는 미성년 범죄자 문제, ‘나는 살인범이다’는 살인죄 공소시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개정과 변화의 담론을 만들려는 이러한 작업은 사회 운동론 차원에서 모색되는 것이다.

운동을 위한 영화는 현실을 곡해할 수 있다. 현실은 그렇게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의 영화들은 사회 환경론을 거부하고 절대 악인 화 한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도가니’, ‘돈 크라이 마미’, ‘나는 살인범이다’는 모두 명확한 악인을 내세우며 그들의 내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도 없다. 뇌 과학이나 유전학의 발달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복수의 대상자가 복수의 주체 자가 되는 상호 인과관계에 있는 현실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할 때 단골로 등장 하는 멘트가 있다.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법체계의 모순이자 한계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당연한 말이기도 하면서 틀린 말이다. 우선 공권력과 법적 체계가 개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고통과 분노이다. 고통과 분노를 해소하는 차원의 보복이 일어나야 한다. 이를 제도적으로 해소해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원천적으로 개인들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질서 유지를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과 법적 체계가 잘 돌아가도 개인들은 복수를 추구할 수 있다. 복수의 이유들이 주관적이다. 객관에 따른다면 그것은 사적인 복수가 될 수밖에 없다. 사적인 복수는 사적인 복수를 낳는다. 왜냐하면 사적인 것은 결국 개인의 주관측면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가질 수 없다. 더구나 그 만족은 고통과 분노의 해소에 있다. 이것의 해소는 아무리 해도 가시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객관의 정량이 아니라 재량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들이 충돌하면 사회질서는 그 기준에서 큰 혼란을 낳게 된다. 자칫 사회질서의 붕괴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질서를 우선하는 관리자들에게는 사적 복수가 금지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사적 복수는 대상이 명확하다. 잘못을 저지른 인물인데 떵떵거리고 살수록 복수의 강도는 강해지고 카타르시스도 커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복수 대상을 명확하게 하기란 힘들고 애매하다. 또한 그런 복수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픽션의 상황은 단순 명확하다. ‘나쁜 놈’과 ‘나쁜 놈에게 당한 사람’의 구도가 그러할수록 관객들은 자기의 입장에서 받아들인다.

다행한 것은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수단으로써 영화의 사회적 기여를 생각하게 하는 점이지만, 그 수단에만 함몰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법은 법일지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법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물론 그 진행자들의 태도가 문화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검찰이 보인 최근의 행태들은 이러한 점을 더욱 생각하게 만든다.

법 자체와 그것을 집행 적용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예링의 말대로 영화 자체보다는 '권리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오히려 사적인 복수보다 나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영화와 같이 통쾌하거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아도 변화는 그것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투쟁을 막는 공권력이라면 존립의 이유가 없다. 영화가 그 지속적인 투쟁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보다 더 화제가 되고 그 배우들이 인기를 얻어 부를 얻는 것은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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