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극장 의존 투자 구조서 국제 공동제작으로…재원 다변화 시험대
한국 영화산업의 투자와 제작을 떠받쳐온 기존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극장 관객 감소로 투자 회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신규 투자는 위축됐고, 제작에 들어가지 못한 작품이 쌓이는 악순환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 투자하고 극장 흥행을 통해 회수하는 기존 방식만으로 제작 생태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면서 해외 자본과 국제 공동제작으로 재원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프랑스가 내놓은 ‘뤼미에르 파트너십(글로벌 영화·영상산업 투자협력 이니셔티브)’은 국내 영화산업의 투자·제작 구조를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한국과 프랑스는 지난 7일(현지시간) 프랑스 생폴드방스에서 열린 국제 영화·영상 정상회의 ‘뤼미에르 서밋’을 계기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간 각각 5억 유로 규모를 영화·영상산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은 약 8000억원을 투입할 예정으로 양국을 합하면 총 10억 유로 규모다.
이재명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뉴시스
주목할 부분은 투자액 자체보다 방식이다. 양국은 각각 독립적으로 펀드를 조성해 자국 콘텐츠 기업을 우선 지원하고, 이를 양국 간 공동 투자와 공동제작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관련 기관이 참여하는 운영협의체도 설치한다. 향후 다른 국가와 기관의 참여까지 열어두고 있어 양국 간 협력을 다자간 투자·제작 네트워크로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그동안 한국 영화의 해외 진출이 완성된 작품의 수출이나 영화제 진출,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한 유통 등에 집중됐다면 이번 협력은 작품의 기획과 투자, 제작 단계부터 국제적인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 영화산업 입장에서는 특히 투자 재원의 다변화라는 의미가 있다. 국내 영화는 오랫동안 극장 매출을 중심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구조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관객의 극장 이용 방식이 달라지고 제작비까지 상승하면서 흥행에 대한 투자자의 위험 부담은 이전보다 커졌다. 일부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영화 투자시장의 전반적인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이에 국내 자본과 국내 극장시장에 집중된 위험을 어떻게 분산할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국제 공동제작은 여러 국가의 투자와 지원제도를 활용해 제작비 부담을 나눌 수 있고, 기획 단계부터 해외 배급과 유통을 염두에 둘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으로 꼽힌다.
그 파트너가 프랑스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는 공공 지원과 민간 투자를 결합해 영화·영상산업의 제작 재원을 다변화해온 대표적인 국가다. 국립영화영상센터(CNC)를 중심으로 영화산업에서 조성된 재원을 다시 제작 생태계로 환류시키는 한편, 세제 혜택 등을 통해 민간 자본이 영화·영상 제작에 유입될 수 있는 장치를 운영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이재명 대통령ⓒ뉴시스
대표적인 제도가 ‘소피카’(SOFICA)다. 민간 투자자가 영화·영상 제작에 투자할 경우 세제 혜택을 제공해 제작 재원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투자 규모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독립 제작사와 중저예산 작품, 신인 창작자 등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운 영역에도 재원이 흘러가도록 투자 기준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국내에서도 프랑스의 이 같은 투자 구조를 참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 프랑스 방문 기간 이재명 대통령과 국내 영화인들의 간담회에서 민간의 영화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소피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관계 부처에 검토를 지시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현재 국내 영화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제작 지원금을 늘리는 것만큼 민간 자본이 다시 영화시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과 정책금융에 더해 민간 투자와 해외 자본, 국제 공동제작을 함께 활용할 수 있다면 제작 재원의 선택지도 넓어진다.
한불 영화산업의 협력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CNC는 앞서 협력을 확대하며 국제 공동제작과 해외 진출 활성화를 논의해왔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기간 열린 영화진흥위원회 간담회에서도 영진위는 CNC와의 협력 확대와 9월 영화·영상 정상회의 개최 계획을 예고한 바 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한국은 단순히 자국의 영화지원 모델을 공유하는 대상이 아니다. K-콘텐츠가 영화와 드라마,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의 영향력을 넓혀온 만큼 한국의 콘텐츠 경쟁력과 제작 역량은 프랑스가 아시아를 비롯한 글로벌 시장과 접점을 확대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이다.
프랑스 역시 이번 뤼미에르 서밋을 영화뿐 아니라 시리즈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 영상산업 전반의 국제 협력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한국의 콘텐츠와 제작 역량, 프랑스가 갖춘 자본·지원제도와 유럽 시장의 네트워크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닿는 셈이다.
글로벌 자본과의 접점을 넓히려는 움직임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 프랑스 방문에서 넷플릭스와 디즈니, 소니픽처스, NBC유니버설 등 글로벌 콘텐츠 기업 경영진과 만나 한국 콘텐츠에 대한 투자 확대를 요청했다. 정부 역시 행정·재정 지원을 통해 한국에서 영화와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영화제도 국제 네트워크의 한 축으로 움직이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박광수 이사장은 뤼미에르 서밋에서 칸영화제와 베를린국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등 세계 주요 영화제 및 기관 관계자들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유럽 TV 시리즈 페스티벌 ‘시리즈 마니아’와 공동 프로그램 가능성을 논의하고, 이머시브 콘텐츠 등 새로운 영상 분야로도 교류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정부 간 투자 협력에서 시작해 제작사와 글로벌 콘텐츠 기업, 영화제와 기술 분야까지 접점을 넓히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만 5년간의 대규모 투자 계획이 실제 국내 제작 현장의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단계가 적지 않다. 현재로서는 양국이 각각 마련하는 5억 유로 가운데 영화 분야에 어느 정도의 자금이 배정될지, 어떤 기준으로 투자 대상이 선정될지 등 구체적인 펀드 운용 방식은 앞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다.
자국 콘텐츠 기업에 대한 투자를 양국 공동 투자와 공동제작으로 연결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단순히 펀드를 조성하는 것만으로 국제 공동제작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닌 만큼 양국 제작사의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파트너를 연결하는 시스템, 계약과 법률 지원, 해외 배급·유통으로 이어지는 후속 기반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투자 기회의 폭도 관건이다. 대규모 프로젝트뿐 아니라 중소 제작사와 독립영화, 신인 창작자도 국제 공동제작과 해외 투자에 접근할 수 있어야 산업 전체의 제작 기반을 넓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프랑스의 지원·투자 모델이 국내에서 주목받는 이유 역시 민간 자본을 유인하면서 상대적으로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운 영역까지 제작 기반을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5년이라는 투자 기간 이후에도 자금이 지속적으로 유입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과제다. 정부가 조성한 펀드와 정상 간 합의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계기로 민간 투자와 해외 자본이 지속적으로 한국 영화·영상산업에 들어올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장기적인 성과를 좌우할 수 있다.
‘뤼미에르 파트너십’의 성과는 각각 5억 유로라는 투자 규모보다 그 자금이 어떤 제작 구조를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해 국내 극장에서 회수하는 데 집중됐던 한국 영화의 제작 공식을 국제 공동제작과 해외 투자, 글로벌 유통을 결합한 구조로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는지가 핵심인 셈이다.
투자 위축을 국내 투자시장의 회복만 기다리며 해결하기 어려워진 시점이다. 프랑스와 시작한 협력이 새로운 자금을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의 기획부터 투자와 제작, 유통까지 국경을 넘나드는 통로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향후 5년의 실행 과정이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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