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목 하나가 마음에 오래 걸렸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처음 이 제목을 마주했을 때, 저도 모르게 멈춰 섰습니다. 왜 '무쓸모'가 아니라 '무가치'일까. 우리가 평생 들어온 언어는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너 커서 뭐 될래?", "그게 돈이 되니?",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한국 사회가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해온 건 '가치'가 아니라 '쓸모'였는데, 이제 우리가 싸우는 건 '무가치함'이라고 합니다. 그 한 글자의 거리가 사실은 심연만큼 깊습니다.
ⓒJTBC 캡쳐
쓸모는 도구의 언어입니다. 망가지면 고치거나 교체하면 그만인, 기능의 영역이지요. 하지만 가치는 존재의 언어입니다. "나는 쓸모없어"라는 말이 사회적 역할을 해내지 못한 자책이라면, "나는 가치 없어"라는 말은 내 생명과 존재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서구의 인본주의 전통은 오래전부터 이 둘을 분리하려 애써왔습니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해도, 실패해도, 당신은 여전히 가치 있다는 믿음— '조건 없는 가치(Unconditional Worth)'라는 개념이 그 사회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요. 반면 우리는 오랫동안 '쓸모 = 가치'라는 등식을 몸에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서구 사회가 무가치함과 싸울 때 '조건 없는 가치'라는 방패를 꺼낸다면, 한국인은 방패 대신 더 날카로운 '쓸모'라는 칼을 갈아 스스로를 증명하려 듭니다.
얼마 전, 문화콘텐츠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실을 가득 채운 눈빛들은 진지했고, 질문도 성실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어떤 아이돌에 미쳐있거나, 드라마를 보다 밤을 지새운 적이 있거나, 이유도 모른 채 무언가에 홀려 자신을 잃어본 흔적이 있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콘텐츠에 무너져본 경험이 없다는 것.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영감을 어떻게 받으세요? 추천하시는 인스타그램 채널이 있나요?"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영감조차 구독하는 시대가 왔구나.
그러나 저는 이내 그 학생들을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게으른 것도, 열정이 없는 것도 아닐 겁니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자기 안의 작고 불확실한 끌림보다 이미 검증된 타인의 정답을 이정표로 삼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쓸모를 증명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나머지, 무가치한 시간을 견딜 여유를 스스로 압수해버린 세대. 그 간절한 눈빛이 사실은 "나도 무언가에 빠지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없어요"라는 말 못 한 고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눈빛들이 여전히 마음에 남습니다. 다정하게.
ⓒJTBC캡쳐
그리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떠오릅니다. 20년째 14편의 시나리오를 썼지만 단 한 편도 세상에 내어놓지 못한 감독 지망생.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끊임없이 싸우는 문제적 인간이지만, 저는 그를 보며 뜻밖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감탄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존경이었습니다. 1년만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스스로를 의심하고 열망을 접어버리는 것이 이 시대의 속도인데, 그는 20년의 무명 속에서도 이야기를 향한 사랑을 꺼트리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아니라 애정으로, 증명이 아니라 근성으로 버텨온 시간. 가장 무가치해 보이는 그 시간이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오래된 진실을, 그는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콘텐츠와 브랜드를 들고 세계를 오가며 저는 한 가지를 깊이 믿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한국의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완성도나 세련됨 때문만이 아닙니다. 무가치함의 불안 속에서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치열하고 절박한 온기— 그것이 언어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의 가슴에 닿는 것이라고. 실제로 이 드라마는 지금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로 송출되고 있고, 해외에 있는 저의 비즈니스 파트너들이 먼저 이 드라마 이야기를 꺼낼 만큼 글로벌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끝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어놓는 순간을 기대합니다. 어쩌면 그 장면이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마음속에 어떤 불꽃을 품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불꽃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시간 동안에도 꺼트리지 않고 있습니까. 드라마 제목은 고발이자 위로입니다. 무가치함과 싸우면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한 인간을 통해, 이 드라마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계절,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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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Team8 Partners 대표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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