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 미용실' '고쳐서 나가는 곳' '극장은 달린다!' 등 공연
영웅 대신 평범한 개인…주류에서 밀려난 '보통의 역사' 조명
올해 하반기 공공극장 무대에 주류 역사에서 밀려난 공동체의 기억을 다룬 작품들이 잇따라 오르고 있다. 영웅주의적 서사나 거대한 정치적 사건 대신,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버텨낸 평범한 사람들의 노동과 일상에 집중하는 흐름이다.
세종문화회관이 지난 12일 세종M씨어터에서 개막해 관객과 만나고 있는 연극 ‘스미레 미용실’은 재일동포 2세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이 20년에 걸쳐 완성한 ‘재일 코리안 3부작’의 완결편이다. 1965년 일본 규슈의 탄광 마을 ‘아리랑 고개’를 배경으로 한다.
자신의 이름을 건 미용실을 꿈꾸는 이발소 주인 수미를 중심으로, 살아남기 위해 일본 국적을 택한 남편, 다리를 다친 시동생, 끝내 조선 국적을 고집하는 아버지 등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한 가족들이 일상을 나눈다. 평온하던 일상은 갑작스러운 탄광 폭발 사고로 무너지지만, 극은 이들이 함께 쌓아온 시간과 서로를 향한 마음으로 삶의 균열을 견뎌내는 과정을 그린다. 60년 전 탄광촌의 이야기는 국적과 출신으로 사람을 배척하는 현대 사회에 공존과 연대의 의미를 묵직하게 묻는다.
연극 '스미레 미용실' 공연 ⓒ세종문화회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 중인 연극 ‘고쳐서 나가는 곳’은 거친 노동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여성 배 수리공들의 서사를 다룬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남성 중심적 노동 환경에 들어선 여성들이 척박한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의지하고 방향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배의 망가진 곳을 수리하여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듯, 삶을 이어갈 방법을 모색하는 여성들이 연대를 맺으며 각자의 삶을 고쳐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이번 공연에는 제도 안에서 환자를 돌보는 병원 노동자 윤자라는 인물을 새롭게 추가했다. 이를 통해 몸으로 세상을 고치는 세대와 제도 안에서 돌보는 세대 사이의 간극을 조명하며 극의 층위를 확장했다.
연극 '고쳐서 나가는 곳' 공연 ⓒ극단 기지
서울문화재단이 기획한 ‘극장은 달린다!’는 1932년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에서 결성된 ‘고려극장’의 94년 역사를 모티프로 한 창작 초연작으로, 지난달 국내외 공연을 모두 성황리에 마쳤다. 1937년 기습적인 강제 이주라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도 흔들리는 화물열차와 트럭을 임시 무대 삼아 공연을 이어간 단원들의 험난한 여정을 담아냈다.
얼어붙은 황무지 속에서도 잊혀가는 우리말과 민족의 혼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예술이 어떻게 시대를 기억하고 이어가는지 증명한다. 이 작품은 8월 중순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에서의 초연을 전석 매진으로 마친 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3개국 순회공연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현지 관객과 고려인 동포들에게 깊은 위로와 공감을 전했다.
연극 '극장은 달린다!' 공연 ⓒ서울문화재단
이처럼 상업 시장에서 외면받기 쉬운 소외계층의 노동과 투쟁의 역사를 발굴하는 것은 공공극장의 명확한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단기적인 수익성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보통 사람들의 서사를 공적인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참혹하고 궁핍한 시대를 겪지 않은 젊은 관객층의 반응이다. 청년 세대는 기성세대가 겪은 재난, 열악한 노동, 생존의 위협을 타자의 과거형 기록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미용실 세 자매의 끈질긴 일상, 곁을 내어주는 수리공들의 연대, 얼음 땅에서 예술로 버텨낸 유랑 극단의 집념은 오늘날 치열한 생존 경쟁과 불안을 마주한 청년들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특정 시대의 고난을 넘어 현재를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평범한 사람들의 생명력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위로를 전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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