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지난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정성호 법무부 장관의 사의설(辭意說)이 사실로 인식된 계기는 지난 24일 MBC 뉴스데스크 단독보도였다. 정 장관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장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는 내용이었다. 민주당이 이날 의원총회에서 검찰의 보완수사권 전면폐지를 당론으로 확정한 직후였다고 한다. 이로 인한 심리적 무력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해당 기사의 분석이었다.
옛날 왕조시대에 ‘걸해골(乞骸骨)’이라는 말이 있었다. 심신은 이미 임금께 바쳤으니 이제 늙은 해골만이라도 돌려달라는 사직(辭職) 청원이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크게 쓰임 받기도 어렵지만 그 자리를 내놓기는 더 어려울 수가 있다. 주군의 곁을 떠나는 자신의 불충이 죄스러워서 머뭇거리는 경우가 있고, 혹시라도 주군의 노여움을 사 그 화가 온 가문에 미칠까 두려워 벼르고 또 벼르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의 윤허가 있어야 사직하나
어느 쪽이든 ‘사직 윤허’를 구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신은 전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늙은 해골뿐이오니 부디 이를 거두어 돌아가서 고향에 묻힐 수 있도록 윤허하소서.”
원래 권력자 주변은 위험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귀양을 가는 길에서도, 심지어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도 북향4배를 올리며 성은에 감읍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물론 충성심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처자와 가문에 까지 미칠 수 있는 참화를 모면하는 의식으로서 행해진 사례가 더 많았을 것이다.
“소신이 죽은 후에도 처자식과 일가붙이 모두의 충성심에는 추호의 변함이 없을 것임을 부디 믿어주옵소서.”
이런 의식(意識과 儀式)이 왕과 신하 사이를 강하게 엮는 의리(義理)의 한 양상이었다.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다. 대통령과 장관을 이어주는 것은 성리학적 의리(왕조의 정치윤리)가 아니라 공적인 책임(민주공화국의 헌정윤리)이다. 처연한 표정으로 몸뚱이나마 돌려주십사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뜻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이 민주시대의 공직이다. 그런데도 정 장관은 왜 머뭇거리기만 할까?
그는 MBC보도 다음날인 25일 “대통령에게 직접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사퇴 의지는 오래전부터 참모들을 통해 전달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27일 국회 법사위에서는 더 분명한 어조로 사퇴 희망을 밝혔다.
“큰 틀에 있어서 검찰 개혁이 대부분 완료됐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완 수사권 폐지를 발표하기 전부터 사실 생각을 해왔고요.”
그는 건강문제까지 거론했다. “최근 들어 심각한 수면 장애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청와대의 반응은 다르다. 청와대 관계자가 이날 이재명 대통령이 순방 중인 브라질 현지에서 기자들에게 “법무부 장관의 공식적인 사의 표명은 확인된 바 없으며, 그래서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좌장마저 떠나고 싶어 안달이라니
검찰청은 물론 그 흔적까지 빡빡 문질러 지워버리겠다는 것이 민주당 강경파의 입장이다. 그 마지막 작업이 보완수사권 완전 폐지인데 민주당은 이달 안에 형사소송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의결 과정까지 마치겠다고 한다. 이 절차가 마무리되고, 10월 2일 공소처와 중수청이 출범하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사사법체계가 작동하게 된다. 정 장관은 그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인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 때의 법무장관들은 ‘검찰 개혁’이라는 것에 대해 물불 안 가릴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조국‧추미애에다 박범계까지 마치 전사(戰士)나 된 것처럼 그 과제를 주도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제동이 걸린 이 미완의 작업을 이재명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기어이 해치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 대통령은 정 장관에게 조‧추‧박과 같은 책임감과 역할을 기대했을 법하다.
그런데 정 장관은 검찰 개혁을 앞장서서 이끌 만큼 배짱 두둑하고 사명감 투철한 기질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민주당의 과속에 끌려 다니기가 힘겨웠을 듯하다. 게다가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공소취소를 위한 정부와 민주당의 무리한 시도들에 호응하기도 힘에 부쳤을 것이다.
친명계 좌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대통령과 정권 안팎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감에다 형사사법체계를 뒤흔들어 놓는데 대한 부담감이 겹쳐 불면의 밤이 오래 전부터 계속됐을 수 있다.
친명계 좌장마저 손을 놓아버릴 정도라면 검찰청 해체, 검사 수사권 완전 박탈, 이 대통령의 공소취소 시도 등에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될 여지가 넓어진다. 그 뿐이 아니다. 정부‧여당은 법 왜곡죄 신설, 대법관 대폭 증원, 재판4심제 도입 등으로 사법체계까지 뒤흔들어 놨다.
일련의 ‘개혁(그들의 표현으로) 조치’들에 부여한 정권 측의 명분과 정당성이 사회적 회의(懷疑)에 직면할 수 있다. 정 장관은 훗날의 책임 추궁을 우려하고 있는 건가?
정말로 가까운 사이라면 이 대통령이 직접 정 장관을 불러서 물어보고 만류하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무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서운함 혹은 괘씸함의 표현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장관이 지속적으로 사의를 드러내 말하는 것은,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든 더 그 자리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다. 해괴하기까지 한 밀당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면의 밤’을 호소하는 이유가 뭘까
“이시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라며 유호인의 낙향을 만류한 성종(조선 9대 왕)의 심정은 아닐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귀국해서 보자” 정도라도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응답이다. 답답하기로는 정 장관이 더하다. 결심을 했으면 그대로 행할 일이지 자꾸 뜸들이듯 하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의아하다.
그간 정 장관의 소신이 무엇이었는지 잡히는 게 없다. 예컨대 검사의 보완수사권 존치가 소신이라면 그 점을 분명히 할 일이었다. 민주당의 형사소송법 개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우물거리듯 하다가 말았다.
그런 자세로는 소위 개혁이라는 것의 공적도, 반대의 용기도 인정받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사퇴의 태도라도 분명하게 해야 할 텐데 ‘새 술은 새 부대에’, ‘잠을 못자서’ 같은 군색한 이유를 대며 미적거리다니.
정 장관이 국회에서 사의설을 재확인한 27일 구자현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휴가를 갔다. 민주당이 30일 형소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고 하는데 그의 행보는 여유롭기까지 하다. 하긴 자리를 지켜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자포자기적 심정일 수도 있겠다. 정 장관에 이어 자신도 사퇴하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인가?
힘으로 조직 구성원들의 흔들리는 신념과 결속력을 붙들어 매겠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민주적 권위와 신뢰만이 조직의 동요를 예방할 수 있다. 미래를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조짐은 일상에서 항상 목격된다. 정 장관의 사의 표명이나 구 대행의 방관적 대응도 그 예가 된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명청(明淸)대전’이 가열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취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조정식 국회의장까지 커다란 짐 한 덩어리를 정권의 등에 올려놨다. “현직 대통령 연임 개헌은 주권자의 선택 문제”(28일 기자간담회)라는 것이다. ‘이재명 임기 연장’ 개헌을 하고 싶다는 말인지, 22대 국회 중 개헌을 차라리 원천봉쇄하는 게 낫겠다는 말(설마!) 인지 가늠이 안 된다.
물리법칙은 정치에도 적용된다. 작용에는 그만한 크기의 반작용이 따르는 법이다. 가당치 않는 상상이나 기도를 하고 있다면 지금 포기할 일이다.
ⓒ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