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위선·네거티브로 얼룩진 선거판
음주·갑질·전과도 진영 방패 뒤로 숨었다
정책 경쟁 사라진 자리, 자극적 슬로건만
유권자, 이미지 정치의 미몽서 깨어나야
20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관위 직원들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벽보를 점검하고 있다. ⓒ 뉴시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그냥 원숭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
정치권의 오래된 우스개다. 그만큼 정치인에게 선거는 절대절명의 단판승부다. 떨어지면 치명적이다. 혹 재기한다 해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영영 사라지게 된다. 2등이란 무의미하다.
선거판에서 비난은 짧고 당선의 달콤함은 길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래서 선거판은 점차 이성을 잃어간다. 유권자에게 자신의 정책과 미래 비전을 설득할 시간과 능력은 없다. 결국 그들은 가장 쉽고 빠른,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상대의 급소를 단번에 찔러 숨통을 끊어야 한다. 거짓말과 위선, 추잡한 오물을 서로에게 쏟아부어야 한다. 정작 유권자가 누려야 할 미래와 행복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퇴행적 현상은 '조폭과 정치인의 공통점'이라는 세간의 비아냥을 떠올리게 한다.
"보스에 절대 복종한다. 패거리지어 다닌다. 나와바리(구역)는 확실히 챙긴다. 싸움질을 즐겨한다. 이권에 따라 움직인다. 전과는 별이다."
지금 우리 정치가 이 비아냥을 단순한 농담으로 넘기긴 어려운 것 같다.
이제 6·3 지방선거와 14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일제히 시작됐다. 그러나 이번 선거판의 풍경 역시 과거의 구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당의 책임감은 희미해졌고, 유권자의 상식보다 진영 논리가 우선되는 공천이 버젓이 반복되었다.
음주운전 전력쯤은 대수롭지 않다.갑질 논란도, 성희롱 의혹도, 전과 기록도 진영의 방패 뒤에 숨으면 희미해진다. 사법 리스크 논란을 안은 후보들, 지역에 대해 전혀 몰라도 중앙정치의 체급만 앞세운 낙하산식 출마, 감옥에 갔다 왔어도 부끄러움도 없이 재등장하는 인물들까지 출사표를 던졌다. 정치의 기준이 능력과 도덕성이 아니라 오직 "우리 편의 승리"로 바뀌면서, 선거는 점점 조폭들의 세력다툼처럼 변해가고 있다.
이런 선거에서 건강한 정책 경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역의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초고령화와 지방소멸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무너지는 지역 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화려한 그래픽과 자극적인 슬로건, 상대 후보의 과거를 파헤치는 네거티브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우리 유권자들은 숱하게 속고 손가락을 잘라왔지만, 지독한 삶의 무게 앞에서 다시 '선거'라는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고 있다. 양극화된 정치지형과 경제 침체의 터널 속에서, 비록 선뜻 내키지 않는 게임이지만 기댈 곳이 없기에 또 한 번 투표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에 정치판이라는 이름의 '리얼리티 쇼'는 당분간 최고의 흥행을 올릴 것이다. 마치 경마장 경주마에 판돈을 건 것처럼 유권자들은 열을 내고, 환호하고, 악다구니를 쓴다. 팍팍한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대놓고 내 목소리를 내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지금 직면한 절망이 내일의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상상하는 선거의 레이스는 유권자에게 일종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 희망의 가치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결말은 대개 희망이 아닌 절망이다. 화려하게 연출된 '리얼리티 쇼'를 진짜 정치라고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미몽(迷夢)에 빠지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거짓말, 억지, 부도덕, 무능력, 편 가르기를 확인하고 마침내 내 소중한 '판돈'을 다 날렸을 때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허탈함뿐이다.
'뽑아놓고 실망하지 않는' 지도자를 만나기란 가뭄에 콩 나듯 어렵다. 한번 선택한 후엔 반품도, 환불도 안된다. 앞으로 4년 동안 속만 끓여야 한다.
선거에서 지면 사람도 아니라며 발악하는 정치인들의 '조폭식 생존 게임'을 위해 왜 유권자가 인질이 되어야 하는가.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지금, 유권자들은 프레임 속 이미지 정치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화려한 분장을 지워내고 후보의 진짜 실체와 능력, 도덕성과 리스크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유권자까지 팬덤의 관객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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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상환 (한경국립대 객원교수)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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