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포함
‘매그놀리아’ 이후 27년 만의 오스카 연기상 후보 가능성도 주목
톰 크루즈가 비행기에 매달리지도, 절벽에서 뛰어내리지도 않는다. 대신 배가 나온 나이 든 석유 재벌이 되어 자신이 초래한 재앙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 '디거'가 낯선 이유는 톰 크루즈의 외형이 달라져서만은 아니다. 지난 40여 년간 그에게 쌓인 스타 이미지를 가져와 정반대 방향으로 사용한다.
'디거'는 꼰대 괴짜 재벌 디거 록웰의 그린란드 빙하 시추 시설에서 발생한 작은 균열이 전 세계를 뒤흔들 역대급 대재앙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크루즈가 연기한 디거 록웰은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지닌 석유 재벌이다. 그린란드 시추 시설에서 벌어진 사고가 전 세계를 위협하는 재앙으로 번지지만,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보다 사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일으킨 문제를 해결할 사람 역시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설정만 놓고 보면 디거는 크루즈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영웅들과 정반대에 있다. 그러나 행동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모습도 적지 않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직접 나서고,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며, 주변의 만류에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의 이선 헌트에게 이런 성향은 불가능한 임무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디거'에서는 같은 속성이 독선과 자기기만으로 향한다.
'디거' 스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 차이가 크루즈의 캐스팅을 단순한 이미지 변신과 구분한다. '미션 임파서블'에서 이선 헌트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실제 크루즈 역시 고난도 스턴트를 직접 소화하며 캐릭터와 배우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다. '탑건: 매버릭'까지 거치면서 위험한 상황에 몸부터 던지는 인물은 그의 대표적인 스크린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디거'는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이 이미지를 전제로 움직인다. 위기에 뛰어드는 태도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은 남겨두면서 방향을 바꾼다. 이선 헌트에게 신뢰의 근거였던 자기 확신을 디거에게 옮겨놓자 독선이 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은 주변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으로 변한다.
외형은 이런 차이를 먼저 보여주는 장치다. 크루즈는 특수분장과 보디슈트를 거쳐 배가 나오고 머리숱이 줄어든 디거가 됐다. 여기에 강한 남부 억양까지 더했다. 오랫동안 날렵한 신체와 움직임 자체를 액션의 일부로 활용했던 모습과 거리를 둔다.
물론 크루즈가 자신의 기존 이미지를 비튼 것은 처음이 아니다. '매그놀리아'에서는 공격적인 남성성을 상품화한 프랭크 T.J. 매키를 연기했고, '트로픽 썬더'에서는 대머리에 거친 말투를 지닌 제작자 레스 그로스먼으로 등장해 스스로를 희화화했다. '콜래트럴'에서는 냉정한 청부살인업자 빈센트를 맡아 선한 주인공의 자리에서도 벗어났다.
'디거'가 이들과 다른 지점은 최근 20여 년 동안 크루즈에게 가장 강하게 자리 잡은 액션 스타의 이미지를 작품 전체의 재료로 삼는다는 데 있다. 특히 1996년 시작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을 거친 직후라는 점에서 대비가 커진다. '디거'는 2017년 '아메리칸 메이드' 이후 크루즈가 출연한 첫 비(非)프랜차이즈 영화이기도 하다.
이 설계를 완성하는 건 영화의 메타적 구조다. 크루즈가 맡은 인물은 정확히 말하면 디거 록웰을 연기하는 배우 커티스 마크슨이다. 관객이 앞서 보고 있던 디거의 이야기는 극중 연극 '포실 풀스'의 리허설이었음이 드러난다. 크루즈는 디거를 연기하고, 동시에 디거를 연기하는 배우 커티스까지 맡는다. 이 구조에서는 크루즈라는 실제 배우의 존재도 자연스럽게 영화 안으로 들어온다. 관객은 커티스가 디거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그 뒤에 있는 톰 크루즈를 의식하게 된다. 특수분장으로 배우를 감추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누구보다 익숙한 스타라는 사실을 활용하는 셈이다.
'버드맨'에서 한물간 슈퍼히어로 배우와 브로드웨이 무대를 통해 스타의 자의식과 배우라는 직업을 들여다봤던 이냐리투가 이번에는 크루즈를 그 자리에 세웠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냐리투는 '버드맨'을 함께 쓴 니콜라스 자코본, 알렉산더 디넬라리스와 다시 각본 작업을 했고, 여기에 사비나 버먼이 합류했다.
영화 자체를 둘러싼 평가는 크게 갈리고 있지만 크루즈의 연기는 이견없이 호평을 받으며 이번 시상식 시즌의 화두로 떠올랐다. 버라이어티는 엇갈린 초기 반응 속에서도 많은 평자가 그의 연기를 높게 평가했다고 전하면서 남우주연상 후보 가능성을 별도로 짚었다. 인디와이어 소속 평론가 짐 헴필은 시사 직후 반응에서 '매그놀리아' 이후 크루즈의 최고 연기라고 평가했다. 작품에 혹평을 내린 매체들도 크루즈의 연기만큼은 따로 떼어 칭찬하는 분위기다. 영국 엠파이어는 영화가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도, 크루즈가 무비스타가 아닌 배우로서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 다시 일깨웠다고 평했다.
실제 크루즈가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오른 것은 '7월 4일생', '제리 맥과이어', '매그놀리아'까지 세 차례다. 마지막 연기상 후보는 1999년 '매그놀리아'로, 이후 20년 넘게 연기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탑건: 매버릭'으로 작품상 후보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고, 지난해에는 영화계 공로를 인정받아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 하지만 경쟁 부문 연기상은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디거'를 두고 오스카 남우주연상 가능성이 거론되는 배경에도 오랜만에 액션과 프랜차이즈 밖으로 나온 크루즈의 선택이 자리한다.
크루즈에게 '디거'의 의미도 이 지점에서 선명해진다. 더 높이 뛰고 더 위험한 스턴트를 선보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스타성을 증명하는 작품이 아닌, 그동안 관객이 톰 크루즈에게 기대해온 확신과 에너지, 영웅의 이미지를 다른 인물에게 옮겨놓고 그 효과를 시험한다. 40년 동안 만들어온 톰 크루즈라는 스타가 이번에는 톰 크루즈라는 배우의 연기 재료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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