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룸’ 흥행 이어 ‘SCP 재단’·‘만델라 카탈로그’ 장편영화로
온라인 팬덤 업고 극장으로…할리우드, 인터넷 호러 영화화 확대
인터넷에서 태어나 이용자들의 손을 거쳐 몸집을 키운 괴담이 할리우드의 새로운 영화 원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 ‘백룸’이 흥행에 성공한 데 이어 ‘SCP 재단’과 ‘만델라 카탈로그’까지 장편영화로 제작되면서 온라인에서 자생한 ‘인터넷 호러’가 극장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최근 A24는 ‘SCP 재단’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장편영화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Spooky Pictures와 Image Nation Studios가 추진해온 프로젝트로, A24가 전 세계 배급을 맡아 2027년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SCP 재단’은 ‘Secure, Contain, Protect’의 약자로, 초자연적인 존재와 현상을 확보하고 격리하는 가상의 비밀기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이다. 출발점은 2000년대 후반 인터넷 게시판이었다. 한 이용자가 기이한 조각상 사진에 ‘사람이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 움직이는 존재’라는 설정을 붙여 가상의 보고서 형식으로 게시했고, 다른 이용자들이 같은 형식으로 새로운 괴물과 사건을 만들어 올리면서 이야기가 확장됐다.
'백룸' 스틸ⓒA24
소설이나 만화처럼 한 명의 작가가 완성한 이야기가 원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다. 누구나 새로운 존재와 사건을 만들어 세계관에 보탤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 지금의 SCP를 형성했다. 이후 게임과 단편영화, 웹시리즈 등으로 재창작되며 인터넷을 대표하는 공동창작 호러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인터넷에서 괴담이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문화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온라인에서는 이용자들이 만든 공포 이야기가 복사되고 변형되며 퍼져나가는 ‘크리피파스타’가 유행했다. ‘벤 드라운드’, ‘NES 고질라 크리피파스타’, ‘캔들 코브’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유튜브의 성장과 함께 오래된 VHS 영상이나 TV 방송, 공공기관 안내영상 등을 연상시키는 화면에 불길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결합한 ‘애널로그 호러’가 등장하면서 인터넷 호러는 텍스트를 넘어 영상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 같은 인터넷 호러를 극장까지 끌어낸 대표적인 사례가 ‘백룸’이다. 시작은 4chan에 올라온 정체불명의 공간 사진 한 장이었다. 노란 벽지와 형광등이 이어지는 텅 빈 공간에 대한 짧은 설정에 이용자들이 새로운 공간과 그 안에 존재하는 괴물을 계속 덧붙이면서 거대한 괴담으로 발전했다. 완성된 이야기를 사람들이 소비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이용자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콘텐츠가 성장한 셈이다.
유튜버 케인 파슨스는 이를 파운드푸티지 형식의 영상 시리즈로 재해석했다. 2022년 공개한 첫 영상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A24는 파슨스에게 장편영화의 연출까지 맡겼다.
결과는 잭팟이었다. 지난 5월 개봉한 ‘백룸’은 북미에서 개봉 첫 주말 8100만 달러, 전 세계에서 1억18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A24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웠다. 약 1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개봉 열흘 만에 전 세계 수입 2억 1200만 달러를 넘어 당시 A24 역대 최고 흥행작에 올랐고, 8월 말 기준 전 세계 흥행 수입은 3억 3000만 달러에 달했다.
특히 ‘백룸’의 흥행은 인터넷 호러가 온라인 일부 이용자들의 취향을 넘어 실제 극장 관객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개봉 첫 주 관객의 약 85%가 35세 미만으로 나타나면서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콘텐츠를 접해온 젊은 관객층의 힘도 확인됐다.
‘백룸’ 이후 할리우드가 인터넷 호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SCP 재단’에 이어 유튜브에서 시작된 애널로그 호러 ‘만델라 카탈로그’ 역시 장편영화로 제작된다. 2021년 알렉스 키스터가 공개하기 시작한 이 작품은 가상의 위스콘신주 만델라 카운티를 배경으로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는 정체불명의 존재 얼터네이트를 다룬다. 온라인에서 팬덤을 쌓은 뒤 할리우드 영화로 영역을 넓히면서 인터넷 호러가 새로운 원작 공급처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존 영화계가 소설과 만화, 게임, 이미 흥행한 영화의 속편과 리부트에서 검증된 이야기를 찾아왔다면 인터넷 호러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성을 증명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작품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미지 한 장이나 몇 분짜리 영상이 이용자들의 참여를 거쳐 하나의 세계로 성장할 수 있다. 이미 온라인에서 수많은 사람이 콘텐츠를 소비하고 재창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지도와 팬덤까지 형성된다.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은 IP를 찾는 할리우드에도 매력적인 요소다. ‘SCP 재단’에는 계속 새로운 괴물과 사건이 추가되고, ‘백룸’ 역시 이용자들이 서로 다른 공간과 존재를 만들어왔다. 하나의 원작을 영화 한 편으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이야기와 캐릭터를 꺼낼 수 있는 토대가 이미 인터넷 안에서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젊은 관객과의 접점도 있다. 블룸 하우스의 제이슨 블룸은 최근 젊은 세대가 기존의 주류 호러와는 다른 성격의 작품에 뚜렷한 취향을 보이고 있다며 이를 극장시장의 새로운 성장 영역으로 바라봤다. 온라인에서 시작한 낯선 호러 문법이 오히려 극장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젊은 관객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인터넷에서 탄생한 콘텐츠가 상업영화로 제작되면서 저작권 문제도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SCP 재단’은 누구나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원작자를 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에도 같은 저작권 이용 조건을 적용해야 한다. 영화화 발표 이후 SCP 위키 측은 A24가 SCP 세계관에 대한 독점권을 가질 수 없다며 관련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러 이용자가 함께 만든 인터넷 콘텐츠를 상업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저작권과 배급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도 향후 과제로 남았다.
또 다른 관건은 인터넷 호러 특유의 감각을 대형 스크린에서도 유지할 수 있느냐다. 이들 작품은 완성도 높은 이미지보다 조악한 영상과 불완전한 정보,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록물을 보는 듯한 감각을 공포의 재료로 활용해 성장했다. 할리우드의 자본과 제작 시스템이 더해지는 순간 오히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열광했던 낯설고 거친 매력이 희석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백룸’의 흥행에 이어 ‘SCP 재단’과 ‘만델라 카탈로그’까지 영화화되면서 인터넷 호러를 향한 할리우드의 관심도 확대되고 있다. 온라인에서 독자적인 팬덤을 형성해온 인터넷 괴담이 극장에서도 흥행 가능성을 입증한 만큼, 할리우드가 기존 소설·만화·게임을 넘어 인터넷에서 탄생한 이야기들을 새로운 영화 IP로 활용하는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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