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된 극장 스피커부터 한정판 명기까지…‘압도적 사운드’의 힘 [공간을 듣다②]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9.03 11:00  수정 2026.09.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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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듣기엔 아깝다"…평생 모은 컬렉션을 대중에 연 사람들

청음실에서 레코드숍으로, Z세대 87% "LP 관심 있다"

"인증샷 성지로 끝나선 안 된다"…청음 열풍이 마주한 다음 과제

서울에서 파주 임진강변까지는 차로 한 시간 남짓, 양평 숲속의 음악당도 사정은 비슷하다. 스마트폰만 열면 수천만 곡이 쏟아지는 시대에 사람들은 음악 한두 시간을 듣기 위해 기꺼이 그 거리를 감수한다. 오프라인 청음 공간의 부상이 단일한 유행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저마다 다른 콘셉트와 향유 방식으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면서, 이 흐름은 음악 산업과 대형 리테일의 공간 문법까지 전방위로 흔들고 있다.


파주 콩치노콩크리트 ⓒ데일리안DB
파주 콩치노콩크리트 ⓒ데일리안DB

이 생태계의 한 축은 시간을 통째로 옮겨온 듯한 헤리티지 공간들이다. 경기 파주 탄현면,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 ‘콩치노 콩크리트’에는 10m 층고의 콘크리트 홀 안에 1920~1930년대 미국과 독일 극장에서 실제로 울렸던 웨스턴 일렉트릭의 ‘미러포닉 M2·M3’와 클랑필름의 ‘유로노 주니어’가 놓여 있다. 100년 전 극장의 스케일을 그대로 재현한 이곳에서 관객은 오케스트라가 실연하는 듯한 압도적 규모의 사운드와 함께, 창밖으로 저무는 임진강의 노을을 마주한다.


오정수 콩치노 콩크리트 대표는 “인류 역사상 음향 산업이 가장 번영했던 황금기가 바로 1920~1930년대 극장용 음향 시스템”이라며 “가정에서는 도저히 들일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오디오 시스템과 음반들을 개인이 혼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공간에서 대중과 나누고 싶어 홀을 열었다”고 밝혔다.


이 거대한 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공간 설계에도 공을 들였다. 오 대표는 “스피커의 에너지감을 완벽히 채우기 위해 층고와 면적 등 공간의 ‘체적’을 치밀하게 계산했고, 음을 단단하게 잡아주기 위해 두께 70cm에 달하는 이중 콘크리트벽과 진동을 방지하는 특수 주철 창틀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양평 모던 클로이스터 ⓒ공식 SNS

양평 서종면, 북한강을 따라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면 노출 콘크리트 건물 ‘모던 클로이스터’가 나온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건축주가 오랜 시간 구상해 지은 이 공간은 스스로를 ‘빛을 듣고 소리를 보는 공간’, 뮤지토리움(Museum+Auditorium)이라 부른다. 음악당 한가운데는 오디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로 꼽히는 ‘JBL 파라곤’이 자리하고, 그 곁을 지키는 ‘골드문트 아폴로그’는 1987년 전 세계 150대 한정으로 제작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도 전시됐던 오리지널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탄노이 웨스트민스터 로열, JBL 에버레스트 등 명기들과 1만여 장의 LP가 2·3층을 가득 채운다.


서초 오디움 ⓒ공식 SNS

서초구에 자리한 ‘오디움’은 이 흐름의 정점에 있다. 1877년 유성기 발명 이후 150년에 이르는 오디오 발전사를 체계적으로 수집·전시하는 세계 최초의 오디오 박물관으로, 건축가 쿠마 켄고와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의기투합해 지었다. 알래스카산 편백나무로 마감한 전시실 벽은 관람객을 마치 숲 한가운데로 들어선 듯한 고요 속으로 이끌고, 웨스턴 일렉트릭의 빈티지 라우드스피커를 비롯한 소장품들이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여정을 완성한다.


영종도 베토벤하우스 ⓒ데일리안DB

생태계의 다른 한 축은 이런 헤리티지를 일상의 동선 안으로 끌어들인 공간들이다. 남양주 화도읍 산자락의 카페 ‘써라운드’는 포칼 스피커로 매장 전체를 감싸는 한편, 2층은 나임 앰프와 프로악 스피커를 갖춘 예약제 하이파이 청음실로 따로 운영한다. 인천 영종도의 ‘베토벤하우스’는 대구에서 작게 시작한 음악 카페가 몇 해 전 규모를 다섯 배로 키워 이전한 곳이다. 몬 어쿠스틱과 손잡고 클래식 음악에 최적화한 스피커를 직접 제작했다.


인사동 ‘안녕 인사동’ 5층의 ‘뮤직 컴플렉스 서울’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수만 장의 LP 중 원하는 음반을 직접 골라 개별 턴테이블로 듣는 도심형 바이닐 라운지다. 커피 대신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이며 음반을 고르는 이곳은 붉은 조명이 시그니처인 이색적인 분위기로 입소문 나며 데이트 코스로도 자리 잡았다.


홍대 틸트 ⓒ데일리안DB

빈티지의 온기도, 카페의 편안함도 택하지 않은 공간도 있다. 홍대입구역 인근 지하에 자리한 ‘틸트’(TILT)는 20여 년간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해온 김창희 대표가 지난해 문을 연 공간이다. 메인 스피커로는 고(故)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전 애용한 것으로 알려진 옛 동독의 스튜디오 모니터 ‘가이타인’(Geithain)을 써서, 소리를 따뜻하게 포장하는 대신 창작자가 작업실에서 듣던 원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3m가 넘는 층고와 요철이 있는 화강암 벽돌 마감으로 잔향을 설계했고, 메인 홀로 이어지는 좁은 터널 바닥에는 진동 스피커 8개를 매립해 저음을 발바닥으로 전달한다. 공간은 극장식 타임별 예약제로 운영된다.


단순한 음악 감상을 넘어, 음악 감상 공간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핵심은 ‘완벽한 단절이 주는 해방감’에 있다. 오정수 대표는 “자유로를 지나 임진강변에 우뚝 솟은 콘크리트 성으로 들어오는 과정 자체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준다”며 “밀물과 썰물에 따라 변하는 임진강의 풍경과 붉은 노을을 통창으로 바라보며, 대화가 철저히 금지된 침묵 속에서 광활한 오디오 사운드에 빠져드는 경험은 도시의 대형 카페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공간들의 약진은 실물 음반 시장 및 상업 유통 채널과의 연계로 이어진다. 청음 공간에서 물리적 사운드의 무게를 경험한 2030 세대가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레코드숍으로 향해 바이닐(LP)을 수집하는 선순환이 대표적이다. 인디 뮤지션의 신보 음감회나 앨범 팝업 스토어가 청음실에서 열리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바이닐 연합회가 미국, 영국, 독일 등 215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Z세대 응답자의 87%가 LP 음악에 관심이 있으며, 80%는 실제로 레코드 플레이어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MZ세대 응답자의 76%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음반을 구매한다고 답했다. 특히, Z세대 응답자의 84%는 음반을 매장에서 직접 구매하며, 57%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구매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회현동 지하상가 LP 전문샵 ⓒ데일리안DB

실제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에는 LP 음반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10여 곳에 이르는데, 최근 방문한 한 레코드 가게에는 20대 소비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국내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인 이서윤(23) 씨는 “한 예능에서 파주 콩치노콩크리트가 소개돼 방문한 적이 있다. 처음엔 음악보다 공간이 마음에 들어 갔는데, LP 음반의 독특한 음질에 관심을 갖게 됐다”면서 “LP 플레이어도 구매하고 벌써 이 레코드 가게에서 10여장의 LP판을 구매했다”고 말했다.


나아가 백화점, 복합쇼핑몰, 호텔 등 대형 리테일 채널 역시 시각 중심 인테리어에서 벗어나 전문 오디오 시스템과 ‘사운드스케이프’를 공간 브랜딩의 핵심 수단으로 적극 채택하고 있다. 화려한 포토존 위주의 구성만으로는 체류 시간을 늘리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소리 자체가 공간의 체류 시간과 브랜드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 자산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 문화가 일시적인 SNS 인증샷 소비나 반짝 핫플레이스 유행으로 소진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과제도 뚜렷하다. 공간 브랜드 마케터 김지민 씨는 “고가의 오디오 장비나 독특한 인테리어는 초반에 반짝 호기심을 끌 수 있지만, 사진 한 장 찍고 나면 재방문할 이유가 사라진다”며 “결국 공간의 생명력은 ‘이곳에 오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주는 큐레이션의 깊이와, 마니아층을 묶어두는 커뮤니티에서 나온다”고 짚었다.


대중음악계 관계자 역시 “지금의 청음실 열풍이 ‘인증샷 성지’ 수준의 단발성 소비로 끝나지 않으려면 소수의 오디오 마니아만을 위한 폐쇄성을 걷어내야 한다”며 “멤버십 프로그램이나 대중적인 눈높이의 해설을 더해 일상적으로 음악을 깊게 듣는 습관으로 이어지도록 문턱을 낮추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거대한 오프라인 청음 생태계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하다. 오정수 대표는 “음악과 예술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지성적 산물”이라며 “앞으로도 오프라인 청음 공간들이 치열한 일상과 경제 활동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온전한 쉼을 제공하고, 깊은 문화적 소양을 채워주는 ‘영원한 축제의 장’으로 남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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