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 의혹에 '미국의 사이버 군사화'로 응수한 북한
해커가 아닌 전사를 자처한 김정은의 속내
사이버 공간을 국가 생존 영역으로 격상시킨 북한의 셈법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7일 평양체육관광장에서 열린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73주년(전승절) 기념행진의식에 참석했다고 28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갈무리
미국과 다국적제재감시팀(MSMT)이 북한의 암호화폐 탈취와 IT 노동자 활동을 경고하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즉각 반발했다. 미국과 한국, 일본 등 11개국이 발표한 공동경고문을 "상투적인 정치적 비난선동"으로 규정하고, MSMT의 보고서를 "거짓정보 유포"라고 일축했다. 북한은 미국이야말로 사이버사령부를 만들어 사이버 플래그 훈련을 벌이고, 전자정보전 우세를 추구하는 나라라고 비판했다.
북한은 제기된 의혹에 대해 해명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미국의 사이버사령부, 전자전, AI, 사이버 군사화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찬 담화를 발표했을 뿐이다. 이 담화는 단순한 반박이 아니다. 북한이 스스로 '사이버 범죄의 가해자'가 아닌 '사이버 전쟁 시대의 주권국가'로 재규정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번 담화에서 북한은 미국이 세계 최초로 사이버사령부를 창설했고, 동맹국들과 연합 사이버훈련을 확대하며, AI를 안보 전략의 핵심으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이버 공간이 패권 경쟁의 장으로 변질된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우리는 해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미국이 사이버 전쟁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행위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행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담화에서 북한은 미국의 사이버 위협성을 비난하면서, 미국의 사이버 작전 개념과 군사적 활용을 길게 거론한다. 이는 논점을 '사이버 범죄'에서 '사이버 군사화'로 이동시키는 전략이다. 이 같은 프레임 전환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장기간 유지해 온 전시 준비 기조를 2026년 헌법 개정을 통해 더욱 분명히 제도화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핵과 미사일, 우주, AI, 사이버. 이 다섯 영역을 하나의 국가안보 체계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이번 담화는 사이버 활동을 제재 회피의 경제적 수단이 아니라 주권과 전쟁 준비 문제로 격상시키고 있다. 사이버 공간을 '인류의 평화와 공영을 위한 공간'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대결과 암투의 마당'으로 규정하는 이중 언어가 바로 그 증거이다.
물론, 미국이 세계 최대의 사이버 작전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이버 공간이 강대국 경쟁의 핵심 영역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일정 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북한의 사이버 활동에 대한 의혹을 해소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미국의 사이버 역량이 아니라 북한의 사이버 활동이 실제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북한은 "모든 영역에서의 국가의 안전과 발전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계속 기울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사이버 활동을 국가 안보를 위한 정당한 수단으로 간주하겠다는 메시지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번 담화는 최근 북한의 국가 운영 방향과 연결된다. 북한이 지향하는 것은 '평시와 전시의 구분이 흐려진 국가체제'이며, 사이버 공간은 그 체제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다.
한국 사회는 북한 해킹을 주로 암호화폐 탈취, 금융 범죄, IT 노동자 문제로 본다. 제재 하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불법 행위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것을 전쟁 이전 단계의 경쟁, 즉 평시전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담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전자전, 전장 우위, AI, 사이버전이라는 표현들이 그 인식을 보여준다.
인식의 차이는 대응의 차이를 만든다. 범죄로 보면 단속과 제재로 충분하지만,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보면 전혀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이번 담화는 단순한 선전 문서가 아니다. 북한은 사이버 공격을 제재 회피 기술이 아니라 국가 생존과 전쟁 수행 능력의 일부로 공식 언어 속에 편입시키고 있다. 자신들의 사이버 활동을 국제법적·정치적으로 정당화하는 서사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이버는 한반도 전략 환경에서 부차적인 영역이 아니게 됐다. 북한이 스스로 그 위치를 격상시킨 이상, 우리도 같은 눈높이로 봐야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총성 없는 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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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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