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에서 만난 세대의 연대와 역주행의 기적…"염세주의 끝에서도 결국 붙잡는 것은 사람 간의 교감"
2003년 극장가에 커다란 문제 제기와 충격을 던졌던 영화 '지구를 지켜라!'가 2026년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를 통해 다시 관객들을 만났다. 개봉 당시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비운의 괴작'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는 OTT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새롭게 발견되며 '시대의 걸작'으로 자리 잡았다.
10일 열린 '지구를 지켜라!' GV에 참석한 장준환 감독 ⓒBIFAN
1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한 장준환 감독은 전날 진행한 지브이(GV, 관객과의 대화) 관객들의 열기에 여전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젊은 분들, 특히 여성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채운 걸 보고 정말 놀랐다"는 감독에게 기자는 이 영화가 계속해서 이야깃거리를 주고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힘이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영화를 만들 때 저만의 '놀이터'를 디자인하고 꾸며서 많은 사람이 와서 놀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다만 보통의 놀이터와는 상당히 달랐죠. 내부가 굉장히 비틀리고 꼬여 있는 공간이에요. 정글짐도 잘못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고, 시소도 옆으로 도는 식이요. 그렇게 변형된 익숙함 안에서 놀다 보면, 놀이 자체의 즐거움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낯선 감정까지 느끼게 되는 희한한 놀이터를 설계하고 싶었어요. 개봉 당시에는 그 놀이터가 너무 생경하고 무섭게 느껴져서 대중이 들어오기 겁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안에서 먼저 용기 있게 놀아본 관객들이 '좀 불편하고 무섭긴 한데, 다 놀고 나면 진짜 짜릿하고 엄청난 재미가 남는다'며 소문을 내주셨고, 그 재미를 깨달은 관객들의 체험과 전파가 세대를 이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네요"
주인공 병구(신하균 분)는 환경적 요인과 지속적인 핍박 속에서 정신이 붕괴되는 비극적 인물이다. 극장에는 병구의 삶이 너무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도 더러 있었다. 영화를 보면 왜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한 인간에게 몰아붙이는지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폭력을 감당하다가 결국 미쳐버리는 사람들에게 늘 시선이 가요. 그들이 왜 미쳐갔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지금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볼 수 있는데요. 병구에게 닥친 탄광 사고, 노사 문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의 충돌 등은 제가 자라며 흑백 TV로 매일 보아왔던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아픔들이고, 이를 한 캐릭터에게 압축해 몰아준 거예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방관하며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그런 병구 같은 인간을 만들어내면, 나비효과처럼 그 한 사람 때문에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누군가 거대한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따뜻한 시선이라도 한 번 더 주고 손을 잡아주어야 우리 사회가 덜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병구에게 측은지심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문득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이, 현실에서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진짜 병구'를 마주한다면 우리 중 몇 명이나 편견없이 그를 바라볼 수 있을까. 대부분은 미치광이 취급을 하며 외면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알게 머르고 병구 같은 사람들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내면 현실에서도 아마 그 한 사람 때문에 지구가 파괴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큰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냥 시선이라도 줘야 우리가 덜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장준환 감독 ⓒBIFAN
이렇듯 장 감독은 인간의 내면, 특히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모순과 심리에 대한 관심을 영화에 녹여내는 연출을 해왔다.
"예전에는 선천적으로 부당함, 불공평함 등에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거 아닌가 싶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보고 그걸 담고 해석하고, 영향받고 행동하며 자라오잖아요. 뭐 염세적으로 태어날 수도 있겠지만요.어쨌든 태어나고 어떤 관계들을 확장해나가면서 사회 안에서 뭔가를 주고받으면서 살아온 게 작품을 만들어가는데 영향을 계속 주고 있는 거 같네요"
영화 속 세계관은 참혹하고 냉소적이다. 인간의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감독으로서 그럼에도 이 세상에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는지 질문을 건넸다.
"병구의 인생도 고통과 괴로움이 있지만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느끼는 사랑과 행복과 순수함이 공존하잖아요. 그 안에서 계속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서로 만들어가야 할지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간단하게 풀어서 얘기하면 그런 의미가 있는데요. 저도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괴로워하지만요. 사는 이유를 느낄 때도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예요. 특히 저는 창작하는 사람이니 관객 분들과 소통이 되고 피드백 내지는 반응을 보여주셨을 때 살아가고 창작하는 의미를 깨닫게 돼요"
'지구를 지켜라!'의 후기를 보면 많은 이들이 신하균의 20대 후반 마스크에 감탄하고 있다. 이밖에도 장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화이'에는 여진구, '1987'의 강동원 등 대중적 호감도가 높은 배우들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강동원 씨 잘생겼죠. 근데 그것만 보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내면의 다른 면, 아주 무섭고 사악한 면까지 같이 할 수 있는지, 그런 부분이 뿜어나오는지를 중요하게 보는 거 같아요. '지구를 지켜라!'만 해도 신하균 씨는 너무나 순수한 소년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차갑고, 또 한없이 슬퍼 보이기도 하는 다층적인 이미지를 내재하는 얼굴이어서 좋았어요"
장준환 감독 ⓒBIFAN
최근 장 감독은 고(故) 신해철의 음악과 삶의 궤적을 담은 작품으로 스크린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져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시점에 연출 데뷔작을 다시 돌아본 그는 23년 전과 지금의 자신이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와 질문의 차이를 느꼈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뀐 건 느껴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같은 것들이 바뀐 거 같은데요. '지구를 지켜라!'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만든 '화이' 등은 굉장히 어둡고 염세적이라면, '1987'에서는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 우리 역사를 다시 이야기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현장에서의 태도도 변했어요. 예전에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제가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깎아 만들려고 했다면 요즘은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배우나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유연하게 흡수하며 자유롭게 지켜보려고 노력해요. 물론 제 근본에 깔린 염세적 기질이나, 잘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뒤돌아보며 질문하는 창작자로서의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말이에요"
"이번 신작 얘기를 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너무나 거대한 인물이라 과연 그 깊이를 제가 얼마나 잘 담아낼 수 있을지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긴 해요. 하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엄청난 기회여서요. 제가 치열하게 살아온 한 시대를 다시 정면으로 바라보고 정리하는 작업이 될 것 같아 저도 무척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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