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적 폭력 배제하고 관객의 상상력 시험… 장르 관객의 ‘선택적 공감’ 꼬집어
사이먼 럼리 감독의 ‘크러쉬드’(Crushed)는 한 소녀의 실종 사건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남는 것은 사건의 진상보다, 그 사건을 마주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누구를 용서하며 어떤 순간 복수를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 사이에서 영화는 관객의 판단까지 흔든다.
사이먼 럼리 감독 ⓒBIFAN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 상영된 ‘크러쉬드’는 학교에 유포되는 잔혹한 영상과 열 살 소녀 올리비아(마고 트리니히 분)의 실종 사건을 따라간다. 올리비아의 어머니 메이(메이 나타폰 라돈 분)는 절망과 분노에 빠지고, 기독교 공동체의 목사인 아버지 다니엘(스티브 오람 분)은 이 상황을 신의 시험처럼 받아들인다. 영화는 범인을 추적하는 스릴러의 형식을 띠지만, 럼리 감독은 사건 이후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감독은 자신을 “14살 때부터 신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무신론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말하는 삶과 실제 인간의 삶 사이의 간극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다고 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결국 그 안에 적혀 있는 삶과 우리의 실제 삶이 대비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에 대한 질문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신이 있다면 왜 나쁜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은 종교 바깥에 있는 이들이 고통 앞에서 던지는 가장 직관적인 질문이다. 럼리 감독은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그 의구심의 중심에 놓으며 영화의 메시지를 확장한다.
그러나 그는 ‘크러쉬드’가 종교의 위선을 비판하기 위한 영화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가 바라본 것은 한 성직자가 자신이 평생 말해온 신앙을 실제 삶에서 감당할 수 있는지였다.
“종교라는 것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고 자신들의 삶을 해석하고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다니엘은 평생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말해왔지만, 가족의 일 앞에서 그 신앙이 가진 모순을 자각하게 되죠”
영화 제목 ‘크러쉬드’는 여러 층위로 읽힌다. 표면적으로는 짓밟히는 폭력을 떠올리게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의미는 육체적 폭력에 머물지 않는다. 인물들이 믿어온 세계, 신앙, 공동체의 정의감, 나아가 관객의 판단까지 모두 다른 방식으로 무너진다. 럼리 감독은 “‘크러쉬드’는 실제로 짓밟히는 의미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굉장히 절망적이거나 무너질 때도 쓰는 표현으로, 모든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크러쉬드’ 스틸컷 ⓒBIFAN
‘크러쉬드’는 하드고어 장르로 소개되지만, 폭력적인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불편하게 다가온다면, 상당 부분을 관객의 상상에 맡기면서 폭력에 대한 반응을 시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잔혹함의 대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태도는 훨씬 복잡해진다.
“호러 영화 관객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고 죽어가는 쇼킹한 영화를 보러 오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물이나 무력한 소녀, 아이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더 금기시됩니다. 이 영화가 지적으로 도전적이어서 좋아하는 관객도 있지만, 보기 너무 불편한 걸 보게 한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죠. 호러 영화 관객들이 갖고 있는 위선도 흥미로운 지점이었어요”
그의 말처럼 ‘크러쉬드’는 관객에게 편한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어떤 인물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 분노가 향하는 방식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군가를 벌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그 판단이 정말 옳은지 다시 의심하게 된다.
럼리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선과 악을 명확히 나누는 방식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크러쉬드’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는 완전히 순수한 위치에만 머물지 않고, 죄를 지은 인물도 한순간 예상 밖의 선택을 한다. 럼리 감독은 이런 모순을 인간 내면의 “회색지대”라고 표현했다.
‘크러쉬드’ 스틸컷 ⓒBIFAN
“이 영화에는 완벽한 악인도 선인도 없죠. 결국 누가 더 나쁘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저는 흑백 논리로 보는 것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감정과 심리의 회색지대를 좋아해요. 정답이 없는 부분이요. 제가 이전에 부천을 방문했을 때 가지고 온 ‘산 자와 죽은 자’(The Living and the Dead), ‘레드 화이트 & 블루’(Red White & Blue)들도 비슷한데요. 항상 사람들이 말하는 고매한 인물이 자기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큰 잘못을 하게 되거나, 그 안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고 대립하는 이야기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국 관객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그는 각별한 감정을 드러냈다. 럼리 감독은 2006년과 2010년 위의 두 영화로 BIFAN을 찾은 바 있으며, 이번 ‘크러쉬드’로 다시 한국 관객과 만났다. 그는 한국영화가 가진 어두운 에너지와 심리적 깊이에 오랫동안 영향을 받아왔다고 했다.
“지난 수십 년을 보면 한국 영화가 서양 관객들에게 굉장히 부상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같은 작품을 많이 봤습니다. 그때를 서양에서는 ‘아시아 익스트림 무브먼트’라고도 이야기했죠. 한국 영화는 어두우면서도 심리적으로 힘든 주제를 굉장히 잘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들은 제가 하는 이런 어두운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싫어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조금 더 받아들여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관객들은 다크한 주제와 지적인 도전을 주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제 상영에서도 관객들이 이 영화의 그런 요소를 좋아해주고, 저를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럼리 감독은 영화 속 여러 인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크러쉬드’ 된다고 했다. 어떤 이는 신체적으로, 어떤 이는 감정적으로, 또 다른 이는 자신이 믿어온 삶의 기준 안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관객도 예외는 아니다. ‘크러쉬드’는 인물뿐 아니라 관객까지 으깨는 영화다. 누군가를 벌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것이 정의롭다고 믿고 싶은 마음, 그러나 끝내 남는 의심까지 함께 무너뜨린다.
한편 ‘크러쉬드’는 영국과 미국에서 10월 초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대만에서도 개봉을 계획 중이다. 그러나 한국 배급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럼리 감독은 “한국에서도 배급사가 관심을 갖고 상영해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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