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첫 발의…정치권 반발로 무산
‘누더기법’으로 정권 바뀔 때마다 폐기 반복
AI·데이터·콘텐츠 성장축 놓고 책임론
“시대 반영 못한 정치논리로 10년 이상 후퇴”
지난 6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민관합동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TF 2차회의' 모습. 서비스발전기본법은 2011년 첫 발의 후 15년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재정경제부
15년 전 국회 문턱에서 멈춘 법안이 AI 시대 성장전략의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처음 발의됐던 이 법안은 의료 영리화 논란과 정치권·시민단체 반발 속에 제정되지 못했다.
정부가 바뀌고 국회가 바뀌는 동안 법안은 발의와 임기만료 폐기를 반복했다. 법으로 시행됐다가 사라진 게 아니라, 한 번도 제정되지 못한 채 15년을 표류한 셈이다.
이 법안은 15년간 여기저기 손질을 하며 본연의 취지를 잃어갔다. 이른바 ‘누더기법’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과거 쟁점이 됐던 ‘의료 민영화’는 이제 자취를 감췄다.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은 AI·데이터·콘텐츠·물류·관광을 묶는 신서비스산업 육성이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6일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전담반 2차 회의에서 “산업 간 빗장을 과감히 열고 연구개발(R&D)·세제·금융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이 시급하다”며 “이제는 서비스산업 발전을 위한 판을 새로 짜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적 역설은 뚜렷하다. 과거 민주당 계열 야당이 견제했던 법안이 이재명 정부의 AI·서비스산업 성장 기반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반대가 공공성 방어였는지, 성장 기반 지연이었는지는 이제 숫자로 따져볼 수밖에 없다. 서비스산업은 이미 한국 경제의 고용 중심축이 됐다. 그럼에도 생산성은 여전히 제조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6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민관합동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TF 2차회의'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재정경제부
15년의 공백…정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큰 기회비용
서발법 논쟁은 새 이슈가 아니다. 2011년 정부안으로 처음 추진됐고, 보건·의료 분야가 포함되면서 의료 영리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논란에 부딪혔다. 정부는 여러 차례 서비스산업 대책을 내놨지만, 담당 부처가 나뉘고 지원 근거가 흩어져 정책 추진에 제약이 있었다는 설명을 반복해 왔다.
지난 2013년 11월. 당시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기획재정부와 KDI가 연 ‘2013년 서비스산업 선진화 국제포럼’에서 “서비스산업의 발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했다.
그는 “서비스산업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창출함에도 생산성 향상이 뒷받침되지 못한 결과,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는 물론 국내 제조업과 비교해서도 경쟁력이 상당히 낮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현 전 부총리의 해법도 지금 정부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는 “서비스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고객감동을 위한 끊임없는 혁신이 있어야 한다”며 “혁신으로 이르는 지름길은 규제 완화와 개방을 통한 경쟁”이라고 밝혔다.
또 “정부는 진입규제를 완화해 경쟁을 촉진하고 신규시장을 창출하며 연구개발(R&D) 투자 유인을 제공하는 등 혁신여건을 조성하는데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덧붙였다.
당시 발언에는 아마존, 위키피디아, K팝을 서비스 혁신 사례로 제시했다. 전자상거래, 집단지성 플랫폼, 글로벌 콘텐츠는 현재 AI 서비스산업의 핵심 시장과 겹친다. 2013년의 서비스 혁신 담론이 2026년 AI·데이터·플랫폼 경쟁으로 확장된 것이다.
물론 서발법이 15년 전 통과됐다면, 한국이 곧장 글로벌 AI 강국이 됐을 것이라는 가정은 검증하기 어렵다. AI 경쟁력은 반도체, 데이터센터, 인재, 자본, 플랫폼, 규제 체계가 함께 만든다. 결국 서비스 R&D와 세제·금융 지원, 규제 정비, 해외 진출 지원을 하나의 법적 틀로 묶는 작업은 15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고용은 서비스업으로 이동했지만 생산성 개선은 더디게 진행되면서 산업 구조의 불균형이 커지고 있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
고용은 65%인데 생산성은 제자리…한국 경제의 뼈아픈 불균형
서비스산업은 더 이상 보조 산업이 아니다. 한국은행은 2025년 BOK 이슈노트에서 민간 서비스업이 2024년 명목 GDP의 44%, 취업자 수의 65%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고 분석했다.
경제 규모와 고용 비중은 커졌는데 생산성·효율성 개선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민간 서비스업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지난 20여 년 동안 제조업의 40% 수준에 머물렀다.
국회예산정책처 분석은 격차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2020~2024년 제조업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2.4% 성장할 때 서비스업은 1.1% 성장에 그쳤다. 이 기간 제조업 대비 서비스업 노동생산성 비율은 2020년 51.5%에서 2024년 47.5%로 낮아졌다. OECD 평균 95.7%, G7 평균 86.7%, 일본 88.2%와 비교해도 차이가 크다.
이 불균형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다. 고용은 서비스업으로 이동했는데 생산성은 제조업에 남아 있는 셈이다. 노동생산성이 높은 산업에서 낮은 산업으로 고용이 이동할 때 경제 전체 생산성에 부정적 영향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예정처 분석이다.
국회예정처는 “인공지능 활용기업이 미활용 기업보다 노동생산성이 제조업에서 2.6%, 서비스업에서 4.2% 높았다”며 “AI 활용 효과가 서비스업에서 더 크게 나타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구 부총리의 발언도 맥락은 비슷하다. 그는 “지금 서비스산업은 AI와 만나 제조업과의 융합, 공공서비스의 혁신, 일상의 대변혁이 일어나는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AI 에이전틱 커머스, AI 자율주행 이동서비스, 공공서비스 분야를 선점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이 AI 강국을 말할 때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반도체가 연산을 맡고 데이터센터가 데이터를 처리한다면, 서비스산업은 AI가 실제 매출과 고용, 생활 변화로 연결되는 시장이다. 생산성 낮은 서비스업을 방치한 채 AI 인프라만 키우는 전략은 반쪽짜리 성장론에 머물 수 있다.
의료 영리화 논란을 우회한 서발법 재추진은 AI·데이터·콘텐츠 등 비의료 서비스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
논란의 의료는 뺐다…‘반쪽짜리’ 법안 강행하는 정부의 속내
정부와 여권은 이번 재추진에서 가장 큰 쟁점을 먼저 덜어냈다. 의료법, 약사법, 간호법, 국민건강보험법, 국민건강증진법 등 이른바 의료 5법을 서발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이다. 김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이 의료 5법을 제외 대상으로 명시한 부분이 이를 부연한다.
정부는 의료 분야를 제외한 법안이라도 국회 문턱을 넘어야 서비스산업 전반에 대한 체계적 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현재 국회에는 김영환·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안,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안 등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안이 계류돼 있다. 범정부 컨트롤타워 설치와 규제 혁신, 신·구 산업 간 갈등 조정기구 설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반대 논리의 핵심이 의료 공공성 훼손이었다면, 정부는 그 쟁점을 제거한 법안부터 통과시키겠다는 선택을 한 셈이다. 이는 정면 돌파보다 우회로에 가깝다. 동시에 15년간 반복된 입법 실패를 더는 방치하기 어렵다는 것이 정부의 속내다.
의료를 뺐다고 서비스산업 논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AI와 결합한 서비스산업에는 개인정보, 플랫폼 독과점, 노동권, 소상공인 피해, 지역 집중 문제가 따라붙는다.
AI 상담, 맞춤형 쇼핑, 자율주행 이동서비스, 콘텐츠 제작, 공공서비스 자동화는 소비자에게 편리함을 준다. 그 비용은 플랫폼 노동자, 자영업자, 지역 중소 서비스기업에 다른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
류진 한국경제인협회장은 “서비스산업을 제조업과 함께 국가 성장전략의 중심축으로 키워야 한다”며 “1970년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제조업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듯 이제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서비스산업 도약의 제도적 기반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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