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불안에 57개국 에너지 방어
스페인·독일 등도 유류세 인하 장기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 우려
공급 절벽 현실화 땐 재정 부담 극대화
서울 서초구 만남의광장 주유소를 찾은 운전자들이 주유를 하고 있다.ⓒ뉴시스
중동전쟁이 촉발한 지정학적 불안과 에너지 위기가 전세계 경제의 핵심 리스크로 부상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급등할 때마다 한국이 유류세 인하 카드를 꺼내 드는 것처럼, 전 세계 40여개국도 세제 감면과 보조금 지급 등 다양한 소비자 지원책을 동원하며 대응에 나서고 있다.
유럽 주요국 역시 한시적 연료세 인하와 휘발유·경유 소비세 감면 조치를 잇달아 연장하며 유가 상승 충격을 흡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정책은 소비자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와 별개로 세수 감소와 재정 부담 확대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각국 재정당국은 물가 안정과 재정 건전성 사이에 경제적 딜레마를 겪고 있다.
중동분쟁發 에너지 쇼크…40개국 에너지 방어전
아랍에미리트(UAE) 코르 파칸 해안에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발이 묶인 유조선과 자동차운반선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뉴시스
10일 한국전력공사 경영연구원의 ‘중동분쟁의 영향 및 해외 정책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 전 세계 57개국이 소매가격 상한제, 연료보조금, 세제 혜택 등의 정책을 시행 중이다.
이 가운데 40개국은 세금 감면 등 소비자 지원을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어 전체 지원 정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유류세 비중이 높은 유럽권 국가들은 한국의 유류세 인하 조치와 비슷한 세제 지원책을 추진하며 고유가 충격 완화에 나서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유류세를 유럽연합(EU) 가이드라인상 허용되는 최저 수준인 경유 리터당 0.33유로까지 낮춘 데 이어, 부가가치세율마저 기존 21%에서 10%로 인하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영국, 스웨덴 등도 일제히 세금 감면, 유류세 인상 계획 유예 조치를 단행하며 물가 방어전의 수위를 극대화하고 있다.
한전 경영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석유의 거래량이 크고, 우회 수출로가 제한적이다. 또 OPEC 회원국이 보유한 예비생산능력의 대부분이 중동 국가에 집중돼 있다”며 “이로 인해 세계 석유 가격 급등과 물리적 공급 부족 현상은 매우 빠르게 전개되며 파급 효과는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중동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에너지시장의 전례없는 혼란이 소비자와 경제전반의 부담이 되고 있어 각국 정부는 소비자 지원과 에너지 절약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 세계가 빠진 ‘유류세 딜레마’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 주유기가 놓여 있다.ⓒ뉴시스
유류세 인하와 세금 감면은 고유가 충격을 완화하는 데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정책이 장기화될수록 부작용도 뚜렷해진다.
영국은 유류세 ℓ당 5펜스의 유류세 인하 조치를, 이탈리아는 휘발유·경유 소비세 인하를 각각 연장해왔지만 그만큼, 국가 재정 부담은 확대되고 있다.
이같은 반복적 조치의 경우 세수 감소와 재정적자 누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복된다.
독일 역시 지난 2022년 한시적 연료세 인하를 시행했지만 세금 인하분의 소비자가격 전가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졌다.
호주는 급격한 되돌림 쇼크가 일었다. 앞서 유류세를 6개월간 절반 인하한 호주는 해당 조치가 종료된 후 급격한 가격 반등으로 시장 혼란을 겪었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석유 가격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EU가 한국과 유사한 세금 구조를 갖고 있다”며 “유럽의 경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유류세 인하를 빠르게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달을 국제 에너지 시장의 중대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중동 지역 긴장이 장기화될 경우 원유와 석유화학 제품 생산이 위축되면서 실질적인 공급 감소, 이른바 공급 절벽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국제유가 상승 압력이 한층 커지면서 각국의 물가 안정 정책도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송영관 선임연구위원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6월 이후까지 장기화될 경우 원유 공급 차질이 현실화하면서 국제유가가 추가로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며 “정부의 재정 부담 역시 커질 수밖에 없는 만큼 유류세 인하 카드를 장기간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고유가 국면이 장기화될수록 세수 감소와 재정 부담이 누적돼 정책 지속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편에서 핀셋으로…유류세 줄이고 바우처 늘려야 [유류세 인하의 늪④]>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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