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환호 뒤 남은 질문…누가 다음 K-무비를 이끌까 [칸, 다음 K무비를 묻다③]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5.29 14:00  수정 2026.05.29 14:00

제79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확인된 한국 영화의 가치 뒤에는 충무로가 마주한 오랜 숙제인 산업의 세대 순환과 생태계 위축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공존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예술적 위상은 여전히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 산업의 토양은 메말라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한상준 위원장·김영구 국제사업팀장ⓒ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2025년까지 시장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이른바 '창고 영화'들이 사실상 모두 소진되면서, 2026년부터는 팬데믹 이후 극심한 투자 가뭄 속에서 새로 제작된 신규 작품들만으로 극장가를 채워야 하는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다. 실제로 올해 국내 주요 배급사들이 확정한 라인업은 약 22편에 불과해 과거 연간 30~40편 안팎을 안정적으로 선보이던 호황기와 비교하면 제작 편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감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올해 초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몇몇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고 해서 산업 전체가 호황인 것은 아니며, 한국 영화 산업이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도전적인 이야기 대신 검증된 상업 공식만 반복되는 사이 관객과 산업이 동시에 쪼그라드는 악순환의 구조를 지적한 셈이다. 투자자들이 손실을 우려해 이른바 안전한 프로젝트에만 자금을 대면서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은 점점 뻔해지고, 이에 실망한 관객이 외면하면 수익이 줄어 투자자가 다시 지갑을 닫는 악순환이 충무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 현장에서 만난 부산국제영화제 박광수 이사장 역시 "지금 한국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감독들의 역량 저하가 아니라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자본이 시장 밖으로 급격히 빠져나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박 이사장은 "'왕과 사는 남자' 같은 천만 영화가 주기적으로 나와줘야 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다시 시장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투자 자본이 복귀하는 바로 그 시점에 정부가 정책적인 가이드라인을 촘촘히 설계하여 한국 영화계가 기형적인 구조로 가지 않고 선순환할 수 있는 좋은 의미의 산업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자본의 악순환 속에서도 최근 중저예산 영화들이 연이어 괄목할 만한 상업적 돌파구를 열고 있다는 점은 충무로에 새로운 희망을 시사한다.


지난 2025년에는 제작비 110억 원의 '좀비딸'이 564만 관객을 모으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올랐고, 올해 역시 105억 원대 제작비의 '왕과 사는 남자'가 1688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불과 30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공포영화 '살목지'가 개봉 7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323만 누적 관객수를 끌어모았다. 수백억 원짜리 대작이 아니더라도 탄탄한 이야기와 명확한 장르성을 갖춘 중급 영화들이 시장을 지탱할 수 있음을 증명하자, 정부와 영진위 역시 민간 투자가 빠져나간 자리를 공적 자금으로 메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올해 영화진흥위원회는 총 818억 원 규모의 정책펀드를 조성하고 정부 출자비율을 50%에서 60%로 상향했으며, 한상준 영진위 위원장은 "한국 영화 산업의 투자 위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허리 역할을 하는 중급 규모 영화의 활성화가 최우선"이라는 의지를 거듭 피력해 왔다.


ⓒ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그 구체적인 결실 중 하나가 올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정주리 감독의 신작 '도라'다. 한상준 영진위 위원장은 "지난해 시작된 중예산 지원 사업을 통해 정지영 감독의 ‘내 이름은’이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된 것에 이어 정주리 감독 '도라'까지 해외 영화제에 소개되는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다"며 "첫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는 지원 규모를 18편으로 확대한 만큼, 제도적 보완을 통해 완성도 높은 허리급 영화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내 자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분투는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어 해외 시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언어 장벽과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해외 자본이나 현지 인력과 협업할 유인이 적었으나, 국내 펀딩 환경의 악화는 역설적으로 한국 영화인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영진위 김영구 국제사업팀장은 "국내 시장의 투자 위축 속에서 현재 우리 영화인들의 관심사 중 하나는 단순히 한국 영화를 해외에 수출하는 것을 넘어, 해외 시장에서 직접 현지 로컬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구조적 변화"라고 설명하며, 영진위 역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하기 위해 올해 30억 원 규모의 영화 국제 공동 제작 시범 사업을 신설해 물밑의 글로벌 프로젝트들을 제도권 안에서 육성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처럼 자본의 지도를 넓히고 시스템을 정비하는 물리적인 노력만으로는 '한국 영화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완벽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결국 시스템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거장들의 뒤를 이을 한국 영화의 다음 세대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따라온다. 이번 칸영화제 기간 프레스센터와 행사장 곳곳에서 만난 해외 영화 관계자와 취재진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세계 영화계가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이라는 위대한 이름들 이후를 이끌어갈 한국의 새로운 시선과 젊은 감독군을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상준 위원장은 "현재 한국 영화계 내부에는 수많은 젊은 감독들이 저마다의 독창적인 잠재력을 품은 채 밑바닥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으며, 멀지 않은 시기에 이 에너지가 세계 무대에서 다시 한번 터져 나올 것"이라는 단단한 신뢰를 보였다.


한 위원장은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K무비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의 주역은 과감하고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 감독들이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현지에서 만난 수많은 해외 관계자들이 이 의견에 깊이 공감하고 지지를 보냈다"고 귀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이르지만 현실적인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당장 내년이나 차기 칸영화제를 기약할 때, 국내 투자 위축의 여파가 본격화되고 박찬욱, 봉준호 같은 거장들의 신작 출품 주기가 맞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이들의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는 걱정이다. 올해만큼의 글로벌 화제성과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업계 관계자들의 냉정한 시선은 현재 한국 영화계가 마주한 인력 풀의 공백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올해 칸영화제가 한국 영화에 보낸 관심은 그동안 국내 감독들이 쌓아온 브랜드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칸 무대에서의 환호가 한국 영화 산업의 미래와 지속 가능성까지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당장의 일시적인 시장 반등에 안주하기보다, 다음 세대의 감독과 새로운 영화가 끊임없이 등장할 수 있는 안정적인 산업 구조를 만드는 일이 충무로에 남겨진 진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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