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 방울로 '뇌전증' 찾는다…서울대병원 세계 첫 규명

김효경 기자 (hyogg33@dailian.co.kr)

입력 2026.05.26 10:11  수정 2026.05.26 10:15

장시간 뇌파 검사·MRI 없이 진단 가능성 제시

162개 진단 모델 분석…혈액만으로 환자 구분

“전신 면역 기반 정밀의료 한 걸음”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피 한 번 뽑는 것 만으로 뇌전증을 감별하고 뇌의 구조적 변화까지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됐다. 장시간 뇌파 검사나 고가의 MRI 촬영 없이 혈액 속 면역세포 변화만으로 뇌전증을 진단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이 제시된 것으로, 연구진은 뇌전증이 단순히 뇌의 문제를 넘어 전신 면역체계 변화와도 깊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주건·이상건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 신용원 중환자의학과 교수, 홍상빈 입원의학센터 교수(현 임상유전체의학과) 공동 연구팀은 뇌전증 환자와 건강한 일반인 총 100명의 말초혈액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뇌전증은 치매, 뇌졸중, 편두통과 함께 국내 4대 만성 뇌질환으로 꼽히는 주요 신경계 질환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구의 약 1%가 앓고 있는 비교적 흔한 질환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국내 환자 수도 꾸준히 증가해 2022년 기준 약 15만명에 달한다.


뇌전증은 뇌 신경망의 비정상적인 전기 활동으로 반복적인 발작과 경련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외상이나 뇌졸중, 뇌종양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지만 환자의 절반가량은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건강 대조군과 뇌전증 환자군의 면역 바코드 비교. ⓒ서울대병원

그동안 뇌전증은 주로 뇌 자체의 문제로 인식돼 왔다. 진단 역시 뇌파 검사나 MRI 등 복잡한 검사에 의존해야 해 시간과 비용 부담이 크다는 한계가 있었다. 최근에는 전신 면역체계 변화가 뇌전증 발생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면서 보다 간편한 혈액 기반 진단법 개발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에 연구팀은 혈액 속 면역세포인 ‘T세포’에 주목했다. T세포 표면에는 외부 물질을 구분하는 고유한 수용체(TCR)가 존재하는데, 연구팀은 이를 일종의 ‘면역 바코드’로 봤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다양한 병원체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면역 바코드가 균형 있게 분포하지만 특정 면역 반응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일부만 비정상적으로 증가하면서 전체 다양성은 감소하게 된다.


연구팀은 뇌전증 환자에서도 이러한 면역 불균형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뇌전증 환자 45명과 건강한 대조군 55명의 말초혈액을 심층 분석했다. 환자군은 약물 조절이 잘 되는 환자, 난치성 환자, 신경염증 동반 환자 등으로 세분화해 질환 중증도에 따른 차이도 비교했다.


분석 결과 뇌전증 환자는 건강한 사람보다 전반적인 면역 바코드 다양성이 뚜렷하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약물이 잘 듣지 않는 난치성 환자나 신경염증을 동반한 환자에서 특정 면역세포가 집중적으로 증식하는 현상이 더 강하게 관찰됐다.


면역 바코드 다양성과 뇌 핵심 구조물 위축의 상관관계. ⓒ서울대병원

연구팀은 이어 총 162개의 진단 예측 모델을 구축해 혈액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환자의 나이나 성별 정보 없이 T세포 수용체의 유전자 조합 패턴만 학습한 모델(랜덤 포레스트 알고리즘)이 가장 높은 성능을 보였다. 해당 모델은 혈액 데이터만으로 뇌전증 환자와 건강한 사람을 평균 80% 정확도로 구분했으며, 예측 정확도를 나타내는 곡선하면적(AUC)도 0.80을 기록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혈액 속 면역 변화가 실제 뇌 구조 변화와도 연관됐다는 점이다. MRI 촬영이 가능했던 환자 21명을 추가 분석한 결과, 면역 바코드 다양성이 감소할수록 뇌의 시상과 기저핵 부위 부피가 줄어드는 뇌 위축 현상이 확인됐다. 두 부위는 발작이 발생하고 확산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영역이다.


신용원 교수(중환자의학과)는 “혈액 속 면역세포의 변화가 뇌의 구조적 위축과 연관된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의미가 크다”며 “뇌전증 환자의 경과를 모니터링하고, 향후 면역 조절을 통한 새로운 치료 전략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건 교수(신경과)는 “뇌전증은 그동안 뇌 자체의 문제로만 국한돼 인식되어 왔으나, 이번 연구는 전신 면역 시스템의 관점에서 질환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환자 개개인의 면역 상태에 기반한 정밀 의료를 실현하는 데 한 발짝 더 다가섰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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