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영화 만드는 시대…투자 시스템은 ‘응답하라 2000’ [한국 영화, 돈이 마른다①]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5.15 01:30  수정 2026.05.15 01:30

OTT 등장 이후 상업영화 제작비 껑충

최휘영 문체부 장관 "현장 실질적 정책 마련하겠다"

2025년 한국 극장가는 해외 IP의 존재감이 유독 두드러진 한 해였다. 디즈니·픽사의 ‘주토피아2’가 860만 관객으로 연간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고,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역시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새로 쓰며 흥행 상위권에 올랐다. 반면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은 ‘좀비딸’의 563만명에 머물렀고, 2012년 이후 처음으로 천만영화가 단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 극장가는 여전히 관객으로 붐볐지만, 시장 안에서 한국 영화의 존재감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쇼박스

다만 올해 들어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왕과 사는 남자’가 1684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고, ‘살목지’ 역시 300만명을 넘어서며 한국 공포영화 흥행 2위 기록을 새로 썼다. 2년 만의 천만영화 탄생과 중저예산 장르영화의 흥행은 여전히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 수요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업계는 지금의 상황을 단순 흥행 성적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을 떠받쳐온 투자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구조적 위기로 보고 있다. 영화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금 흐름은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현상을 단순한 흥행 성적 문제로만 읽기는 어렵다. 영화는 특정 산업의 상품이기 이전에 한 사회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고 전달하는 문화적 주체성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헤어질 결심’이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K-무비가 글로벌 문화 산업의 중심축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도 한국 고유의 서사와 정서를 담아내는 영화산업의 축적이 있었다.


극장가에서 할리우드 대작과 일본 애니메이션 존재감이 커지는 현상 역시 흥행 경쟁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투자와 제작 기반을 갖춘 해외 콘텐츠는 안정적으로 공급되는데, 한국 영화가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할 경우, 극장 시장 자체가 해외 IP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우려다. 2000년대 초반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 당시 영화인들이 “문화는 상품이 아니다”라고 외쳤던 이유 역시 자국 영화산업 기반이 무너질 경우, 결국 자국의 이야기와 시선 역시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실제 한국 영화산업의 체력은 약화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4년 극장 전체 매출은 1조 1945억원으로 전년 대비 5.3% 감소했다. 2019년 대비 극장 매출 회복률 역시 한국은 62.4%에 그쳤다. 미국(73.3%), 프랑스(95.2%), 일본(90.6%)과 비교해도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2025년 한국 영화 매출액은 4191억원으로 전년 대비 39.4% 감소했고, 관객 수도 4358만명으로 39.0% 줄며 2005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체 극장 관객 수 역시 1억 609만명, 전체 매출은 1조 470억원으로 3년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영화관 시장이 회복되지 않는 배경으로는 OTT 확산과 티켓 가격 상승 등이 먼저 꼽힌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습관이 굳어졌고, 관객들은 이제 “영화관에서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인가”를 이전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월 구독료를 지불하면서 OTT를 이용하는 상황에서 영화관 티켓값까지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만큼 작품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시장은 소수 흥행작 중심으로 쏠리고 실패 위험은 더욱 커졌다.


ⓒ뉴시스

문제는 시장은 위축되고 있는데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본 규모는 오히려 커졌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후 제작 지연과 인건비 상승, OTT 등장 이후 높아진 콘텐츠 경쟁, 글로벌 시장을 고려한 스케일 확대 등이 겹치며 상업영화 제작비는 빠르게 뛰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 산업의 이른바 황금기 당시 상업영화 평균 제작비는 15억~30억원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100억원 규모 펀드 몇 개만으로도 여러 편의 상업영화 제작과 투자가 가능했다.


그러나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 상업영화 평균 순제작비는 약 94억원, 평균 총제작비는 115억원 수준까지 올라왔다. 시장은 어려워졌는데 영화 한 편이 감당해야 하는 리스크 규모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셈이다.


하지만 이를 떠받칠 투자 구조는 여전히 과거 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와 같은 제작비 규모를 감안하면 최소 500억원 이상 규모의 펀드 여러 개, 혹은 1000억원대 펀드가 동시에 움직여야 시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영화인연대가 최근 “1000억원 규모 이상의 대형 전략 펀드 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배경이다. 반면 현재 운용 중인 영화계정 투자조합 상당수는 200억~400억원 규모에 머물러 있다. 100억원 안팎 영화 몇 편만 투자해도 자금이 대부분 소진되는 구조다.


코로나19 이후 영화 수익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민간 투자자들도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한국 상업영화 평균수익률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10.9%였지만, 2020년 –30.3%, 2023년 –31%까지 떨어졌다. 천만영화 두 편이 나온 2024년에도 평균수익률은 –16.4% 수준에 머물렀다. 투자배급사들의 상황도 악화됐다. 2019년 약 7858억원 수준이던 5대 투자배급사의 배급 매출액은 2022년 4797억원, 2023년 4366억원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투자배급사는 단순 투자뿐 아니라 투자 유치와 배급, 부가판권 관리까지 영화 제작 전반을 움직이는 핵심 축이다. 이들의 투자 축소는 곧 시장 전체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역시 영화산업 위기를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최근 영화·영상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2590억원 규모의 ‘K-콘텐츠·미디어 전략펀드’를 조성하고, 민간 투자자의 손실 부담을 줄이기 위해 모태펀드 우선손실충당률도 기존 15%에서 20%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올해 모태펀드 영화계정 844억원 규모 운용사 선정도 이미 마친 상태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우리 영화·영상 산업의 흥행 이면에 감춰진 현장의 고충과 산업 전반의 불안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며 “현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 정책들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정부는 2010년부터 2024년까지 모태펀드 영화 계정에 총 2270억원을 신규 출자해 5607억원 규모의 투자조합을 결성해왔다. 2024년에는 총 325억원을 출자해 653억원 규모의 조합을 만들었고, 2025년에는 출자 규모를 350억원까지 늘렸다. 2024년 개봉 상업영화 총제작비 가운데 모태펀드 자조합 투자액 비중은 20.5%에 달했다. 과거 3~8% 수준과 비교하면 정부 의존도는 훨씬 높아졌다.


결국 지금 구조에서는 몇몇 대작 흥행작이 시장 전체를 떠받치는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실제 투자 축소가 이어되면서 제작 편수 자체가 줄고 있고, 상대적으로 수익 회수가 불확실한 중간 규모 영화나 신인 감독 프로젝트들은 가장 먼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의 다양성과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