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디스패치는 배우 조진웅이 10대 시절 절도 및 강도 상해 등 중범죄로 소년보호처분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튿날인 6일, 조진웅은 소속사를 통해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한다”며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갑작스러운 은퇴로 사건이 일단락되길 원했겠지만, 사건의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중의 기대를 모았던 ‘시그널 시즌2’ 등 차기작들은 주연 배우의 하차로 인해 공개 시기와 방식이 모두 불투명해지는 등 큰 난관에 봉착했고, 정치권과 법조계, 문화계는 소년법의 실효성과 유명인의 과거 검증 범위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중범죄를 저지른 배우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기만”이라 비난하고, 반대쪽에서는 소년법의 취지인 ‘갱생’과 ‘신상 비공개 원칙’을 들어 과도한 신상털기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논쟁 속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주체는 소거됐다. 바로 30년 전 사건의 피해자다. 가해자의 은퇴와 사회적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의 의사와 고통은 철저히 배제됐다. 이 사태를 ‘유명 배우의 추락’이 아닌, ‘피해자의 실종’ 관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선, 언론 보도의 방식부터 짚어야 한다. 디스패치의 보도는 피해자의 제보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 판결문과 기록을 역추적해 터뜨린, 이른바 ‘기획 보도’의 성격이 짙다. 보도 과정에서 피해자가 사건의 공론화를 원했는지, 혹은 잊고 지내던 과거가 다시 들춰지길 거부했는지에 대한 확인 절차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범죄 피해자에게 사건의 재소환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동반한다. 피해자의 명시적 동의 없는 과거 들추기는 ‘국민의 알 권리’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상업적 폭력일 수 있다. 언론이 가해자를 심판대에 세운다는 명분으로, 피해자를 강제로 광장에 끌어낸 꼴이다.
당시 가해자였던 조진웅의 사과도 방향이 틀렸다. 조진웅의 입장문은 ‘대중’과 ‘팬’을 향한 사과로 채워졌을 뿐, 과거 자신의 행동으로 고통받았을 피해자를 향한 직접적인 메시지는 부재했다. 그는 “배우의 길에 마침표를 찍겠다”고 했으나, 이는 직업적 거취의 표명일 뿐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과정 없이 이루어진 일방적인 은퇴 선언은, 책임 이행이 아닌 상황 회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소년법을 근거로 배우를 옹호하는 일각의 주장은 피해자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일부 법조계와 문화계 인사들은 소년법 제32조 6항(소년보호처분은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을 근거로 조진웅의 복귀나 보호를 주장한다. “철없던 시절의 잘못으로 성인의 삶 전체를 부정해선 안 된다”는 논리다. 이 주장은 가해자의 시간만을 고려한 반쪽짜리 정의다. 가해자가 법의 보호 아래 갱생해 ‘국민 배우’로 성장하는 동안, 피해자가 겪었을 박탈감과 고통의 시간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트라우마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일 수 있다. 피해자의 회복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해자의 ‘갱생할 권리’만을 외치는 것은, 법리적 타당성을 떠나 도덕적 공감 능력이 결여된 주장이다.
특히 이 논란을 정치적, 이념적 도구로 소비하는 옹호론자들의 태도도 문제다. 실제 피해자가 존재하는 형사 사건을 추상적인 ‘제도 논쟁’이나 ‘진영 대결’로 치환하는 순간, 피해자는 ‘고통받은 개인’이 아닌 논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조진웅 사건의 본질은 유명 배우의 몰락이 아니다. 과거의 폭력이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처리되는가의 문제다. 사과 없는 은퇴는 기만이고, 동의 없는 폭로는 2차 가해다. 그리고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는 법리 논쟁은 공허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배우의 복귀나 소년법에 대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이 소란스러운 뉴스가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재생일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무대 뒤로 사라진 가해자보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피해자의 의사를 묻는 것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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