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 사료로 바라본 '서울의봄'

남가희 기자 (hnamee@dailian.co.kr)

입력 2023.12.31 01:00  수정 2023.12.31 01:00

통일부, 1979~1981년 남북회담 문서 965쪽 공개

북한, 12·12 사태 이후 화기애애 분위기로 '위장 평화 공세'

南, 신군부 헌정유린 '홍역·감기' 빗대기도

5·18 직후부터 언쟁…"인민 탄압자들 지지할 생각 없어"

1980년 3월 4일 남북한 국무총리 회담을 위한 3차 실무대표 접촉. ⓒ통일부

1980년 진행된 남북총리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에서 남북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두고 언쟁을 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측은 5·18의 원인을 북한 탓으로 돌려 비상계엄령을 내린 것에 대해 강력히 불만을 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는 1979년 1월~1981년 12월까지 정치·체육 분야 관련 남북회담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남북대화 사료집' 965쪽을 최근 공개했다.


사료에는 △남북 간 변칙 접촉 △남북 간 탁구협회 회의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시 '3당국 회의' 제의 △남북 총리회담 실무대표 접촉 △남북 당국 최고책임자 회담 제의 △남북한 체육회담 제의 관련 진행 과정과 관련된 내용이 담겼다.


12·12 사태 이후인 1980년 1월 1일 이종옥 정무원 총리 명의로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에서 남북 대화를 제의하는 내용의 담긴 서한이 발송됐다. 북한은 이 서한에서 "고위당국자회담도 성숙시켜나갈 용의"가 있다며 "귀하와 직접 만나 격의 없는 의견을 서로 나누자"고 제의하면서,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장소는 판문점·평양·서울뿐 아니라 "제3국도 무방하다"며 대화 재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국통일평화위원장인 김일 부주석 명의로 당시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연합' 공동의장, 김수환 추기경 등과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인물인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에게도 같은 취지의 편지를 보냈다.


앞서 1979년 12월 20일부터는 이듬해 모스크바 올림픽에 함께 나가자며 그해 3월 중단됐던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대표 회담을 다시 재촉했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끊겼던 남북 직통전화도 3년 6개월 만에 이어졌다. 북한이 12·12를 전후해 태도를 바꾼 것이다.


사료집에는 "북한이 혼란을 틈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과 세력을 조성하려는 '위장 평화 공세'를 펼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평가가 실렸다.


통일부 당국자는 지난 28일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은 국제적으로 양극체제가 완화하는 가운데 한반도에 대화·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면, 주한미군 철수 논의 등 대미 협상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대화 공세에 나설 때라고 당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이 통일전선전술의 수단으로 남북대화를 활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일부는 '남북대화 사료집' 제9권과 제10권 중 1979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정치 및 체육분야 남북회담문서 965쪽 분량을 28일 공개했다. 사진은 사료집 제10권의 겉표지(왼쪽)와 속표지 이미지 ⓒ통일부

그러나 5·17 비상계엄과 5·18 민주화운동 이후 북한의 태도는 돌연 강경해졌다. 최규하 대통령은 5월 18일 특별담화 중 "대남적화 책동이 날로 격증"되고 "남침의 결정적 시기 조성을 획책하고 있다"며 5·18을 북한의 선전·선동 탓으로 돌렸는데, 북측은 이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북측 수석대표인 현준국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은 "5월 17일 귀측 당국자들은 갑자기 우리를 걸고 남조선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이어서 포고령을 내리고 공공건물들과 대학들에 무장한 군인들을 들이밀어서 봉쇄했다"며 "(또) 천수백여명의 청년학생들과 정치인들을 체포·구금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폭압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현 대표는 그러면서 "외신들은 유신 체제를 되살리기 위한 일종의 군사쿠데타이며 5·16 군사정변을 방불케하는 사건이라 논평하고 있다"며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두고 "(그런데) 귀측 고위당국자는 지난 18일 이른바 특별담화라는 걸 발표해 대남적화책동이 격증됐다느니 남침의 결정적 시기를 노린다느니 하고 우리를 걸고 들면서 폭압 조치는 북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에 취했다고 역설했다. 대화 상대방인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발"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남측은 사실관계를 부인하지 못한 채 "내정에 대한 간섭" "내부사정 시비"라고 반발하면서 회의 진행을 주장했으나 분위기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언론인 출신의 남측 대표는 신군부의 비상계엄조치와 5·18 등 일련의 혼란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따금 가다가 어려운 문제가 나온다"며 당시 상황을 '홍역'과 '감기'에 빗대기도 했다.


그러자 북측은 "투쟁에 일어선 인민들을 탄압하는 탄압자들을 지지해야 된다는 말이냐. 우리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따져물었다.


이 같은 언쟁은 10차 접촉까지 이어졌다. 북측은 우리 정부가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명분으로 자신들을 이용하는 것을 문제 삼았고, 우리측은 북측이 실질적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고 결렬을 유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렇게 동력을 상실한 총리 간 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은 제10차를 끝으로 성과 없이 막을 내렸고 직통전화도 9월 25일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남북대화 사료집에는 북한의 성명이 그대로 실리면서도 '전두환' 이름 대신 '전OO'이라는 표기가 등장했다. 남북대화 사료집은 남북대화의 역사를 기록하는 정부 공식기록물로 원문 그대로 싣는 게 일반적인데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욕설을 실명과 같이 쓰게 되면 혹시라도 생길 불이익을 우려해 이름을 피휘(避諱)한 것으로 보인다. 사료 9권 말미에 수록된 1980년 11월 11일자 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남조선 인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전두환 군사파쑈독재'라는 표현에서만 유일하게 실명이 나왔다.


이후 1981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에서 최고당국자 상호방문을 제의했다. 김일성을 '주석'으로 칭하며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6월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개회식에서 상호방문이 어렵다면 판문점 또는 제3국에서 최고당국자 회담을 하자고 거듭 제안했다. 최고당국자 상호방문 및 회담 제의는 전두환 정부가 남북관계로 국면을 전환하고 돌파구를 찾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 대남 성명을 통해 전 대통령이 "살인의 괴수이며 민족의 백정"이라고 실명 비난하고 "우리와 상종할 상대로 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전 대통령의 초청 제의 후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지적하는 북한의 실명 비난은 더욱 험악해졌다.


북한은 '불법비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정권강도'(노동신문), '민족의 백정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처단돼야 할 대상이다'(노동신문), '대결만을 추구하는 추악한 반공광신자'(평양방송) 등 제하의 관영매체 기사를 통해 입에 담기 힘든 수준의 극렬한 비난 표현으로 전두환 정권을 맹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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