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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⑩] 인생드라마, 황금캐릭터 ‘디어 마이 프렌즈’


입력 2021.06.03 08:18 수정 2021.06.06 08:28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드라마 포스터 ⓒ이하 tvN 제공 드라마 포스터 ⓒ이하 tvN 제공

보고 싶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이 울 것을 직감했으니까. 결혼을 앞둔 이가 먼저 결혼한 친구에게, 출산을 앞둔 임부가 먼저 엄마 된 인생 선배에게 듣는 얘기가 마음을 두드리는 법. 먼 얘기, 남의 얘기라 할 수 없는 얘기를 볼 자신이 없었다.


태어나면 죽는 게 당연한 일, 그 사이의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는 게 인생임을 알면서도 시작보다는 끝에 가까워진 행로에서 금세 닥칠 삶의 진실에 직면하는 게 두려웠다. 마치, 잘 알지 못하면 더디 올 것처럼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노희경 작가에 연기라면 대한민국 최고를 달리는 배우들이 총집합했으니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피하길 5년, 더는 피할 수 없는 때가 왔다. 두어 살 많은 선배, 동갑내기 친구, 서너 살 어린 후배가 먼저 접했고 ‘인생 드라마’라며 강력추천했다. 얘기는 나눠야 맛이다. 무슨 얘기인지 혼자 모를 순 없었다, 못 본 나로 인해 그들의 인생 수다를 방해할 수도 없었다. 목놓아 울었다는 후기를 들으며, 울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연출 홍종찬, 극본 노희경, 2016), 나의 늙은 친구들 이야기가 인생으로 들어왔다. 물론 울었다, 자꾸 울었고 계속 마음이 무너졌다. 신기한 건 웃으며 울었다, 울며 웃었다. 슬프지만 않고, 즐겁지만 않았다, 인생을 닮은 작품이었다.


인생의 보람,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 ⓒ 인생의 보람,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 ⓒ

인생 드라마에는 반드시 황금캐릭터가 있다. 작가가 마차를 만들고, 감독이 엔진을 장착시키면, 손으로 굴리든 운전을 하든 마차를 움직이는 건 배우들이다. 배우들은 작품 속 인물, 캐릭터가 되어 시청자를 만난다. ‘황금’이라고 한 이유는 두 가지에서다. 가짜 아니고 진짜 순금의 캐릭터, 번쩍번쩍하지 않지만 고귀하게 빛나는 황금빛 캐릭터가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빽빽하다. 누구 하나도 빼놓아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욕쟁이 할매’ 김영옥과 ‘멜로 마왕’ 조인성마저 빼고 얘기하는 것으로 호연과 열연을 펼친 조·단역의 배우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못함을 용서하시길.


‘디어 마이 프렌즈’는 여섯 여자를 축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언니 단짝’ 조희자(김혜자 분)와 문정아(나문희 분), ‘동생 단짝’ 장난희(고두심 분)와 이영원(박원숙 분), 두 세대의 중간에서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보살처럼 언니들과 동생들을 살피는 오충남(윤여정 분) 씨가 그들이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초로와 중늙은이 같아도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 이들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 박완(고현정 분)이 있다.


친구처럼 부부처럼 ⓒ 친구처럼 부부처럼 ⓒ

희자 씨는 남 불편한 일은 안 하며 살아온 배려의 아이콘이고, 정아 씨는 남들이 불편해하는 일에 대신 앞장서는 희생의 아이콘이다. 그랬던 희자 씨가 치매에 걸려 주변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그랬던 정아 씨가 남편이 불편해 몸서리칠 일을 감행한다. 죽도 맞고 타이밍도 좋은 두 사람이건만,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 서로를 향한 애정이 큰 만큼 가슴속 깊이 쌓인 응어리가 있어 격돌한다.


무척 심각해 보이지만 걱정할 건 없다. 친구들이 구덩이에 빠진 차 바퀴를 뽑아 올리려 힘을 모을 때 홀로 꽃을 따는 문학소녀 감성의 희자 씨와 반백 년을 참다 흑맥주 한 병 자유로이 마시겠다고 ‘뒤통수 별거’를 감행하는 정아 씨는 누가 뭐래도 찰떡궁합이다. 평생 절친 정아에게 원망을 쏟아낼 때의 희자 모습, 영과 육의 세계를 오가는 듯한 배우 김혜자의 연기를 잊기 어렵다. 희자가 치매임을 전해 듣고 받은 충격의 강도만으로 두 사람 우정의 깊이를 절감케 한 배우 나문희의 실감 연기는 오래도록 떠오를 것이다. 남편 김석균(신구 분)과 벌이는 귀여운 밀당도.


절친과 앙숙은 종이 한 장 차이 ⓒ 절친과 앙숙은 종이 한 장 차이 ⓒ

난희 씨와 영원 씨는 뜨거운 관계다. 어려서는 첩의 딸 영원을 선입견 없이 보는 유일한 친구 난희였고, 늙어서는 난희를 위해 무엇이라도 참고 양보하는 영원이지만, 그사이 오랜 세월엔 난희 남편의 외도를 둘러싸고 두 사람은 앙숙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불꽃이 튀고 으르렁댔다. 너무 사랑해서다. 씨름 선수 못잖은 에너지로 영원히 치고받을 것 같던 두 친구는 ‘암’이라는 공통분모로 서로를 보듬는다. 우정을 회복하고 더욱 탄탄하게 다진다.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천하무적 커플이 된 것이다. 이런 친구 한 명만 두면 좋겠다 싶은 우정을 보여준다.


고두심이야 연기 잘하기로 정평이 났고 연기대상 최다 7번 수상에 지상파 3사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배우다. 말 한마디 곰살맞게 하는 법 없는 난희, 자기 말이 정답인 똥고집 난희를 미워하지 못하게 연기했다. 동시에, 속눈썹을 붙이고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고 그 어느 때보다 여성미를 발산했다. 박원숙은 익히 독한 시어머니 역, 남자주인공 엄마 역으로 화려한 의상과 강한 연기 파워를 과시했던 배우다. 그러함에도 새삼, 이번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며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깜짝 놀랐다. 독기를 빼고 세상 통달한 사람처럼 부드럽게 연기하니 외모가 부각됐다. 극 중 잘나가는 배우 이영원 역에 다른 배우는 상상을 허락하지 않겠다.


이렇게 고운 골드미스가 또 있을까 ⓒ 이렇게 고운 골드미스가 또 있을까 ⓒ

진짜 내 친구였으면 좋겠다 싶은 캐릭터가 있다, 바로 오충남! 돈이 많아서만도 아니고, 기분파에 통이 커서만도 아니다. 입은 뾰족해서 입바른 소리 잘하지만, 손길과 마음길은 부드럽고 관대한 사람이다. 평생 숫처녀로 늙어 남편도 자식도 없다지만, 이이보다 일가친척에 친구들 일을 내 식구 돌보듯 할 수가 없다. 솔직한 게 특히 매력인데, 그 솔직함에서 새겨둘 만한 인생 격언이 나온다. 명언 제조기가 따로 없다. 늙은 것보다 젊은 것을 좋아한다고 노래를 하는데, 겉보기에는 그래서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호구 잡히고 고졸 검정고시 학원을 5년째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젊은 세대와 소통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다.


배우 윤여정이 표현했기에 오충남 캐릭터가 더욱 실감 나고 공감지수를 높였다. 결코 과하지 않은 눈물과 감정연기로 시청자 마음을 도리어 먹먹하게 했고, 우리 집에 있을 법한 고모처럼 편안히 일상 연기를 했다. ‘Let it be, 냅둬’와 같이 상대의 가치관과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는 충남의 모습이 평소 윤여정의 모습을 연상케 해 설득력을 키웠다. 시골 동문회의 이성재(주현 분) 오빠를 좋아하다가 오빠가 희자 언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깨끗이 물러서는 모습 역시 윤여정이 연기했기에 소화가 잘됐다.


엄마도 이모도 모두 내 친구 ⓒ 엄마도 이모도 모두 내 친구 ⓒ

고현정의 배우 에너지는 실로 대단하다. 위 5인의 연기 장인들은 물론이고 여성들이 바라는 훈훈한 남성상을 매력적으로 표현한 배우 주현, 여성들이 가장 기피 하는 남편상을 보여주다 봄눈 녹듯 변화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배우 신구까지 연기파 대선배들 틈바구니에서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휘둘리고 밀리기는커녕 중심 딱 잡고 ‘무게중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이처럼 혼자 돋보이는 역할보다 여러 배우와 호흡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반사판’이 되어 줄 때 고현정이 더욱 빛난다는 것을 ‘디어 마이 프렌드’를 통해 확인시켰다.


그런 고현정이기에, 자꾸 보니 정말 닮은 듯한 고두심의 억센 딸이자 모든 ‘나의 늙은 친구들’과 마치 친구처럼 대등한 관계 속에 이야기를 집대성하는 역할이 맡겨졌고 해냈다. 뿐인가. 첫사랑 한동진 선배 역의 신성우, 일생의 인연 서연하 역의 조인성, 상대 배우의 나이가 어떻든 눈높이를 맞춰 어우러졌다. 끝을 모르겠는 연기력이다. 5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나이를 알 수 없게 아름답지만, 설사 그에게서 주름이든 살로든 나이가 보인다 해도 딴죽 걸지 말자. 이 정도 연기력에 소소한 운운은 실례다.


코스모폴리탄 5월호 ⓒ출처=tvN '디어 마이 프렌즈' 홈페이지 사진첩 코스모폴리탄 5월호 ⓒ출처=tvN '디어 마이 프렌즈' 홈페이지 사진첩

한참을 울리던 드라마는 마지막에 함박 미소를 선물한다. 저렇게 살고 싶다! 인생 황혼길에는 이성이든 동성이든 상관없이 애인인지 친구인지 헷갈릴 정도의 애정과 우정을 지닌 누가 곁에 있어야 웃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오늘도 죽음을 향해 한 발 더 내딛는 게 아니라 그저 오늘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 다만 소원이 있다면 지금의 이 좋은 순간 ‘붉은 노을’이 조금 더 오래가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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