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훈자(Hunza) 가는 길

입력 2007.09.01 11:09  수정

-훈자 가는 길에는 실크로드의 역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길과의 전쟁(VII)

베샴(Besham), 이른 아침 인더스 강의 풍경

방 앞으로 흐르는 인더스 강 물소리에 뒤척이다 잠을 깼다. 전화가 없는 탓에 호텔에서 일하는 남루한 옷의 할아버지가 와서 문을 두드려 모닝콜을 한다. 조금 있다 다시 찾아온 할아버지는 불을 때서 데우는 물을 사용하는지라 더운물이 잘 나오는지 묻는다. 아직 해가 뜨기에는 이른 시간, 강가는 푸른색 새벽공기를 감고 잘도 흐른다. 내 고향 지리산 밑 경호강 물 흐르는 소리 생각하고 무성한 숲을 기억하는데 이즈음부터는 숲이 잘 없다. 마른 산과 회갈색 물만 있을 뿐…….

오늘 가야할 거리는 470여km, 모두다 KKH에 해당하는 산길이다. 예상시간 12시간이라고 하니 점심식사와 쉬는 시간 합하면 못해도 14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른 아침 작은 동네 베샴의 거리는 비교적 조용하다. 여기서 훈자에 이르기까지 중간 즈음에 해당하는 칠라스(Chilas)까지 234km라는 이정표를 본다. 시속 30km를 잡고 못해도 6-7시간은 걸릴 것이다.

본격적으로 KKH를 달리자 첩첩 산중,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강물이 흐른다

길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첩첩산중 천 길 낭떠러지로 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떠오른 햇살에 깊은 계곡물이 용트림하듯이 떠내려간다. 간혹 차가 서로 교행을 할 때면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이 꼭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찔하다. 죽음이 바로 한걸음 옆이다. 금방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이제 막 숨을 거두는 그 시간의 간격은 짧고 또 흘러가는 시간일 뿐이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순간만큼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분기점이 된다. 이곳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공간적 의미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가 얼마나 지척인지를 몸소 체험하게 만들어준다.

마을이 안 보이는데도 간간이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시골이어서 그런지 여자들은 차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볼까봐 히잡으로 얼굴을 가리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앞서 걷는 모습도 보인다. 여름방학이 남부, 북부가 달라 북부에 해당하는 이곳은 개학이 이른데 지금이 개학 철 이란다. 저들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작은 마을 빠탈의 풍경, 산골사람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쉰 곳이 빠탈 이라는 작은 시골인데 인더스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계곡물을 끼고 있는 동네다. 여기서 인더스 강으로 흘러드는 물은 아주 맑다. 아마도 저 골짜기 깊숙한 곳에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외국인들이 다녀도 그냥 지나치는 곳에서 우리가 내리자 아이들이 모인다. 그들 눈에 신기한건 우리의 모습만이 아니다. 그들 생각에는 별거 아닌 그들의 사는 모습을 신기해하고 볼 것 없는 그들의 동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우리의 태도가 재미난 모양이다. 사진한 장 찍자니 폼부터 잰다. 웃음을 유도하기 위해 ‘김치~!’ 대신 ‘짜파티~!‘ 하고 소리치니 깔깔대는 녀석들의 웃음이 정겹다.

베샴을 떠나 가장 먼저 만나는 작은 시골 도시가 다수(Dasu)이다. 지나왔던 여느 시골과 별 다름이 없는데 시골은 큰 신작로가 바로 시장이다. 그래서 저잣거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든 듯 분주한 저잣거리에는 시골로 갈수록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우리 같은 외국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부딪혀보지 못한 환경에 노출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런 면은 어릴 때 우리의 시골마을과 크게 틀리지 않다. 이럴 때는 가능한 한국식으로 가벼운 목례와 미소를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5분여 우리를 기다리던 기사 아쉽(Asif)이 길을 재촉하는데 얼마 안가 타이어가 펑크가 나고 말았다. 작년 러시아 바이칼을 갔을 때 오래된 차의 크랭크축이 끊어져 6시간 동안 오도 가도 못하던 그 날이 생각났다. 차에서 내려 고쳐지기를 기다리는데 발아래 낭떠러지로 흐르는 물소리 이 높은 곳까지 들린다. 옛날 이 길을 지나던 대상들도 잠시 숨을 고르며 똑같은 물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고단하고 질박한 삶 속에서 듣는 것과 즐기기 위해 여행자로 떠나온 내가 숨을 고르며 듣는 물소리는 그 느낌이 틀릴 것이다.

KKH의 계곡, 발 아래 낭떠러지로 흐르는 물소리 이 높은 곳까지 들린다

칠라스까지 가려면 아직 1시간 반을 더 달려야 한다는데 길 중간에 갑자기 차가 선다. 길가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온천수란다. 섭씨 80도는 돼 보이는 거의 끓는 물 수준이다. 발을 담글 수도 없는 물에 목에 두른 손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는다. 더운 수건이 뙤약볕 받은 얼굴에 오히려 상쾌한 기분을 준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누군가가 달려들어 개발한다고 난리 났을 거라는 일행의 말에 다들 수긍하며 파안대소다. 뜻하지 않은 온천수를 만난 것은 시원한 물로 목 축이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을 다시 생기 돋게 만들었다.

12시가 넘어 가는데 우리의 발길을 사로잡는 유적 하나를 발견한다. 유명한 칠라스의 암각화이다. 칠라스 지나서도 같은 규모의 암각화 군(群)을 만나게 되는데 모두 바로 길 옆에 있다. 아마도 대상들이 지나던 옛 실크로드의 원형에 맞추어 길을 넓히고 포장했다는 뜻일 것이다. BC 1세기부터 AD 10세기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암각화들 중에는 동물과 사냥꾼의 모습을 담은 것들도 보이고 후대의 것으로는 농부, 왕족, 폴로 경기 등 다양한 주제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본 것들은 부처와 스투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것들은 단단한 바위 표면을 긁거나 쪼아낸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나중에 훈자에서 쿤자랍패스 가는 길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의 암각화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들에는 말을 타고 수렵을 하는 당시의 생활상이나 여러 동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칠라스 암각화 1

이런 바위에 왜 당시의 사람들은 불상을 새기고 탑을 그렸을까? 인도로 오가던 수도승 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다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라고 설명하는데 이런 불상과 스투파가 그려질 당시는 인도, 중국, 우리나라 할 것 없이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꼭 스님이 아니라도 그들의 여행에 대한 안녕과 구복을 위해 일반 사람들이나 상인들도 새겼을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게 표현된 탑이나 불상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로 불경을 적어놓은 명문들이 오늘 그린 것처럼 선명하다. 지나는 사람들이 탑하나, 불상 하나를 새겨 넣을 때마다 이곳에는 절집이 하나씩 생긴 것이고 사람들 가슴마다에는 부처님 한 분씩을 모시게 되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두광(頭光) 안으로 그려진 붓다의 얼굴은 굵은 터치로 그려진 루오의 그림처럼 원만하고 대개가 다 평온하며 조금씩 웃는 모습이다. 신광(神光)으로 둘러싸인 몸체는 자유롭고 선 채로 앉은 채로 편하다. 전라도 천 불 천 탑을 세웠다는 운주사의 그 못난 부처와 빵떡 같은 탑들에 대한 기억이 나면서 서로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하게 표현된 앙증맞은 스투파는 세월을 건너고 길을 건너 중국 서안의 대안탑이 되고 우리의 황룡사 목탑이 되거나 석가탑, 감은사지 탑이 되었을 것이다.

칠라스 암각화 2

작년 바이칼에서 만났던 암각화를 기억한다.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지역 남부, 샬라볼리노에 가면 기원 전 7000년쯤부터 기원 후 14세기까지의 암각화가 3km에 이르는 정도로 조성된 지역이 있다. 세계 3대 암각화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중 일부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달리는 이르쿠츠크(Irkutsk) 인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같은 계열의 암각화들이 몽고 울란바토르 국립 박물관에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던 것을 보았다. 또한 내 사는 인근, 선사시대 바다 생활과 수렵을 하는 모습이 새겨진 반구대 암각화나 그 곁 화랑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새겨진 천전리각석을 생각한다.

수천 년 전 사람이 사는 곳마다에는 그곳이 서로 얼마나 떨어졌던 생각과 생활방식에 공통점이 있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칠라스 인근 인더스 강가의 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받아든 것은 오후 두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더위에 입맛이 떨어진 탓인지 짜파티나 란의 밀가루 냄새가 싫어져 짜이를 연거푸 마셨다. 실크로드는 음식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끼니마다 먹는 것은 밀가루 반죽을 펴서 구운 짜파티나 란, 그리고 커리소스에 닭고기다. 그 중 란이나 짜파티는 옛날 초여름이면 할머니가 구워주던 밀떡이나 쪄먹던 보리개떡에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이곳에서는 란이 되고 짜파티가 되어 커리소스를 얹어 먹는 것이고, 실크로드가 끝나는 이탈리아에서는 피자가 된 것이 아닐까? 더 비약하면 프랑스의 바게트 빵까지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무알콜의 바바리아 맥주

혹시 갈증이 가실까 하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무알콜 맥주 캔 하나를 따서 마셔본다. 바바리아(Bavaria)라는 상표를 가진 그 맥주를 마신 감상은 냉장고에 넣지 않은 것이어서라는 변명을 제외하고도 “참말로 네 맛도 내 맛도 없다”는 것이다. 입을 헹구고 나오니 캄캄한 곳에 응접실 같은 곳이 있는데 놓인 자리들이 마치 간이침대를 닮아 한사람이 누우면 꼭 맞는 사이즈에 양끝은 베개를 해도 좋을 것처럼 푹신한 쿠션 형태를 하고 있다. 식당 사람에게 물으니 지금도 트럭을 모는 운전수들이 와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고 무슬림들이 기도시간이 되면 기도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단다. 실크로드 옛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음이다.

칠라스 지방 인근과 훈자에서 쿤자랍패스 가는 두 곳이 KKH 전 노선 중 가장 험난한 곳이다. 칠라스 인근은 천 길 벼랑 같은 곳의 연속이라 깊은 계곡에는 급류를 가로지르는 현수교 기법의 나무다리들이 많이 놓여있다. 마치 유격훈련에서 두 줄 타기 하듯이 듬성듬성 놓인 나무를 밟고 지나야 하는 그런 다리들이 곳곳에 있는데 촬영이 금지란다. 또한 어쩌다 만나게 되는 오래된 다리에 차를 좀 세워주길 바라지만 들어줄 것 같지도 않다. 갈 길이 바쁘다는 핑계이지만 조금은 그런 초라한 흔적들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칠라스 지방의 명물, 현수교

때로는 사람뿐 아니라 차도 건널 수 있는 제법 큰 현수교들도 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주인공이 무너지는 다리를 뛰어 건너는 모습을 촬영한 것도 이 지역 이라고 한다. 이런 다리는 이곳부터 길기트(Gilgit) 시내 한가운데 있는 것 까지 앞으로도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칠라스 지나면서는 사람들이 사는 오아시스 지역을 제외하고는 메마른 산과 물밖에 보이지 않는 단조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융기와 습곡, 단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오래된 땅은 노년기 지형의 전형을 보이는데 멀리 보이는 높은 산 중에는 옛날 빙하가 녹아 없어진 자리들도 보인다. 그런 곳은 빙하가 쓸고 내려간 길을 따라 자갈돌과 흙더미들이 쌓여있다. 파키스탄에는 해발 7,000m 넘는 산들만 700개가 넘고 해발 8,000m급 산만 네 개가 있는데 6000m 이하의 산들은 이름이 없고 5000m급은 모두 고개라고 칭 한단다.

가장 높은 것은 8,611m의 K2봉으로 현지인들은 ‘큰 산‘이란 뜻을 가진 초고리(Chogori)라고 부른다고 한다. 8,126m의 낭가파르밧(Nanga Parbat)은 산스크리트어로 ‘벌거숭이산’이란 뜻이고, 별칭은 디아미르(Diamar)인데 이는 ‘산의 왕’이라는 뜻이다. 낭가파르밧 남동벽(南東壁)은 수직으로 4,500m나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어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기도 하여 한때는 ‘마(魔)의 산’이라고도 하였다한다. 다음이 카라코람산맥 발토로(Baltoro)에 있는 높이 8.068m의 히든피크(Hidden Peak)로 가셔브룸I봉(GasherbrumⅠ)이라고도 한다. 가셔브룸은 발티어(語)로 ‘아름답다’라는 ‘Rgasha’와 ‘산’이라는 ‘Brum’의 합성어이다. 나머지 하나는 8047m의 브로드피크(Broad Peak)로 ´넓은 눈의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육중하고 험악한 괴물´이라는 별칭이 있다.

칠라스에서 한 시간 반쯤 지나서 인더스 강을 반대편으로 건너는 다리 하나를 만난다. 라이콧 다리(Raikot Bridge)이다. 이곳은 길에서 낭가파르밧(Nanga Parbat)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베이스캠프까지 8시간이면 도착한다는 설명을 듣는다. 앞으로 이 길을 지나는 여행객들은 하루쯤 시간을 내어 베이스캠프까지 가보는 이벤트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히말리아, 왼쪽 힌두쿠시, 그리고 가운데 카라코람 산맥이 만나는 지점

잠시 졸다 깨니 어느 틈엔가 차는 자글롯(Jaglot) 지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와 인더스 강을 따라가며 아시아판과 인도판 지층이 충돌하는 지점이면서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오른쪽(east side) 히말리아 산맥과 왼쪽(west side) 힌두쿠시 산맥 그리고 가운데 우리가 가고 있는 카라코람 산맥(north side)이 만나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세 산맥이 만나 이루는 강은 두 줄기로 왼편이 길기트 강이고 오른쪽이 인더스 강인데 이곳에서 길기트 강이 인더스 강에 합류된다. 방위를 표시한 표지석과 높지 않게 마련된 전망대에서 우리는 탄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다고 한동안 부산을 떨었다.

멀리 만년설을 모자처럼 쓴 산이 보이고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부터도 3시간 가까이 차를 타야한다. 잘해도 밤 9시가 넘어야 훈자에 도착할 것 같다. 차가 펑크가 나고 또 그것 때문에 차량을 정비하고 점검하는 시간이 보태져서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길 수밖에 없음을 안다.

길기트와 힌두쿠시 산맥을 왼편에 두고 우리는 카라코람 산맥을 향해 직진을 한다. 군데군데 꽤 넓은 오아시스가 보이는데 그런 곳은 어김없이 작은 마을부터 큰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그런 가운데 노말(Nomal)가까이에서 발견한 푸른 숲의 계곡은 도시를 세워도 좋을 만큼 넓고 광활하게 발달되어 있다. 멀리서이지만 저녁을 짓는 연기 오르는 모습을 본다. 고향을 느낄 수 있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오아시스들은 척박하지만 물이 흐르는 퇴적층을 따라 발달하게 된다. 이런 오지에서도 물길 따라 숲 따라 동네를 이루고 서로 등을 부비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그들의 삶속에서 아직 때 묻지 않은 심성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훈자의 앞 산으로 불리는 라카포시(7,788m) 봉우리

점차 날이 어두워지고 해발 2,000m가 넘는 길로 들어섰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여니 더운 기운이 가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작지만 조금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휴게소 같은 곳에 차가서고 길가에는 토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7,788m의 라카포시(Rakaposhi) 봉우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어두워진 탓에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돌아올 때 다시 보자고 가이드 쥬비가 내 마음을 다독인다. 잠시 내려서 다리를 풀고 쉬었을 뿐인데 아침나절에 더위를 견디기 위해 입었던 옷에 쌀쌀함을 느낀다.

조금씩 안정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라카포시는 훈자의 앞산으로 부른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어서 훈자 혹은 카리마바드(Karimabad)라 불리는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시간을 넘게 가야 한단다. 그러면 어떠랴. 내일 출근할 일도 없을뿐더러 지금까지 13시간을 지났고 고지가 목전인데 말이다.

슬슬 머리가 무겁기 시작한다. 해발 2,500m에 해당하는 고산은 두통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지만 다들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다. 중학교 다니는 막내 녀석이 신경이 쓰인다. 이런 고산에서는 성장 속도가 빠른 청소년기부터 20대 초반의 아이들이 가장 잘 못 견딘다. 성장속도를 조혈(造血)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폐활량이 큰 탓에 혈중 산소포화도가 쉬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틈엔가 차가 깊은 계곡을 내려섰다 다시 오르는가 싶더니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꽤 깨끗한 호텔에는 많은 사람들이 밤공기를 즐기고 있는데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밤 10시를 훌쩍 넘겼다. 베샴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14시간이 넘게 걸렸다. 방 앞에 놓인 편안한 의자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니 칠흑 같은 어둠속에 훈자의 마을에서 빛나는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내일은 이 동네를 천천히 산책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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