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듣는 포효´.."이건 분명 하늘이 준 기회"

김현 기자 (hyun1027@ebn.co.kr)

입력 2007.09.04 09:36  수정

<데일리안 현장르포>´안중근 의사 발자취를 찾아´<1> 한국~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신한촌 기념비 "자주와 독립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聖戰)"

지난 7월 12일 오전 8시경 서울 남산 안중근 기념관 앞 안 의사 동상 앞에서 30명의 탐방단원들이 출발 기념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2007년 7월 12일 오전 8시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30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민족 독립운동의 의지를 세계에 알린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98주년을 기념해 안 의사의 독립투쟁 유적지를 탐방하기 위해서다.

전날 기념관에서 오리엔테이션을 겸해 하루 밤을 보낸 것으로 10박 11일간의 ‘안중근 대장정’의 첫 테이프를 끊은 탐방 단원들은 기념관 내 안 의사 초상에 참배한 뒤 첫 탐방지역인 러시아로 가기 위해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러시아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체결한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의 후속조치로 조선군이 해산되자, 당시 돈의학교 등 교육사업에 힘쓰고 있던 안 의사가 건너가 항일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고속도로를 달린 지 4시간 남짓. 단원들을 태운 버스는 러시아 자루비노항 왕복선이 오가는 속초항에 다다랐다. 단원들은 머나먼 여정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발걸음으로 하차했다.

속초항 대합실엔 자신의 몸집만한 가방을 짊어진 러시아 보따리상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여행을 온 듯 보이는 러시아인들의 짐 사이엔 우리나라에서 만든 전기밥솥 등 가전제품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속초항에 도착한 탐방단원들이 러시아 자루비노항으로 가는 동춘호에 탑승하고 있다.
탐방단원들은 대합실에서 2시간여를 기다린 뒤 출국수속을 거쳐 단원들을 러시아로 싣고 갈 여객선인 ‘동춘호’에 오를 수 있었다. 동춘호는 주3회 정도 자루비노항과 속초항을 오가는 선박이었다. 단원들 대부분이 배를 타고 타국으로 향한 것은 처음인 탓인지 거대한 여객선의 규모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감탄사도 잠시. 화물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동춘호’는 발전기 고장으로 예정된 시간을 한참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출항을 하지 못했다. 수리를 마치고 시험 운행을 하던 동춘호는 얼마 가지 못해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 접안을 해야 했다.

여기다 장마철이라 먹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던 하늘에선 비를 뿌리기 시작했고, 그나마 잠잠했던 파도도 점점 거칠어졌다. 승객들 가운데선 동요가 일어났고, 급기야 10명이 하선을 선택했다. 하선 승객 중엔 탐방 단원 1명도 포함됐다. 그는 다른 동료들의 만류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내 출항한 배를 세워 그를 데리러 온 예인선을 타고 육지로 돌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동춘호는 자신에게 정해진 길을 갈 수 있었다. 당초 4시경 출발 예정이었던 동춘호는 저녁 8시가 돼서야 제대로 출항했다. 이미 동해 바다엔 짙은 어둠이 깔려 버렸다. 단원들은 1명이 중도하차한 아쉬움과 거친 파도에 대한 두려움을 안은 채 러시아로 가는 동춘호와 동행했다.

단원들 대부분은 거친 파도탓에 배가 기우뚱 거려 억지잠을 청했다. 일부는 배멀미를 진정시키기 위해 선상에 나가 바람을 쐬기도 했다.

러시아 군사항인 자루비노항의 전경
어두운 바다 저 멀리엔 오징어 배가 조업을 하고 있는지 밝은 불빛들이 보였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은, 시작부터 난관을 맞이했던 탐방길이었지만 무엇인지 모를 희망을 기대하게 했다. 비록 안 의사가 러시아로 이동한 경로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안 의사도 러시아로 향하는 길 어디에선가 어두운 밤, 많지 않았을 불빛들을 보면서 조국의 깜깜한 현실을 타계할 희망을 엿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린 지 16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바다에선 하나 둘 이름모를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루비노항에 도착했다는 선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단원들은 각자 짐을 챙겨 하선할 채비를 서둘렀다.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는 통제가 엄격했다. 물론 자루비노항이 군사항인 탓도 있었다. 까다로운 입국절차를 거친 뒤 단원들은 러시아에 첫발을 내딛었다. 풍부한 가스와 원유 수출을 토대로 한 러시아의 경제성장이 러시아 대륙 끝자락인 이곳까진 미치지 못한 듯 녹슨 철제 구조물과 낡은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항일운동 본거지이자, 발해 유적지가 발견되고 있는 크라스키노의 전경
자루비노항을 나서자 우리나라에서 수입해 온 것으로 보이는 중고 대형버스들이 오가고 있었다. 버스엔 우리나라의 시내버스 번호판과 각종 스티커들이 붙어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원들은 전용버스에 몸과 짐을 싣은 채 본격적인 러시아 탐방길에 올랐다. 첫 방문지는 크라스키노. 크라스키노는 당시 한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최근 발해 유적지가 발견되는 등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현재 이곳엔 우리나라의 ´N´ 기업에서 운영하는 알로에 농장이 위치해 있다.

크라스키노내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얀치헤(연추하리, 煙秋下里)는 최근 항일의병활동의 본거지로 밝혀진 곳이다. 안 의사와 동지들도 이곳 마을의 이장이면서 재력가였던 최재형 선생이 주도해 결성한 ‘동의회’에 소속돼 국내진공작전 등 항일운동을 펼쳤다.

안 의사의 단지동맹을 기념하는 단지동맹비(왼쪽)와 기존 단지동맹비가 위치해 있던 주카노보 다리 인근의 기념비 터.
특히 안 의사는 1909년 3월경(음력 2월 7일) 김기룡, 강기순 등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넷째손가락 첫 마디를 자르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 조국의 국권회복 의지를 다졌다. 안 의사는 옥중 집필한 자서전에 “태극기를 펼쳐 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 자를 크게 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 기록한 바 있다.

자루비노항에서 1시간 남짓 버스로 이동하자 탐방단은 ‘단지동맹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세운 단지동맹비는 단지동맹을 결성한 곳이 아닌 연추하 마을 인근의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농장 정문 반대편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손가락 마디와 불꽃 모양이 떠오르는 형상인 기념비는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앞면은 물론 뒷면에 러시아어로 ‘코레야(Κорея·한국)’라고 새겨진 단어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파낸 흔적도 발견됐다.

탐방단을 안내한 고려인 3세, 송지나 교수(러시아 극동대, 한국학)는 “당초 기념비는 주카노보 다리 아래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곳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이 돌맹이를 던지는 등 훼손이 심하고, 저지대에 위치해 물에 잠기는 등 관리도 제대로 안 됐다”며 “이 때문에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한국 기업의 협조를 얻어 지난 6월 당초 세워진 곳에서 1㎞ 정도 떨어진 이곳 농장 앞으로 옮겨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안 의사가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었던 마을.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수풀로 덮여 있다.
탐방단의 김한수(25세, 한경대 토목공학 4년)군은 “안 의사께서 순국한지 100년이 다 돼 가는데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셨는데, 안 의사를 상징하는 단지동맹비마저 이렇게 훼손돼 있는 것을 보니 너무나 안타깝다”면서 “어려움은 있겠지만, 국가 차원에서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이 기념비라도 제대로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했다.

탐방단은 실제 단지동맹을 맺었던 현장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단지동맹을 맺은 현장은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이 수풀로 우거져 있었다. 더욱이 지난 3월경 군사지역으로 포함돼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탐방단은 길가에서 대강의 위치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탐방단은 단지동맹 현장 인근에 형성된 작은 마을을 둘러봤다. 그 곳은 당시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중 하나로,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연자방아의 맷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맷돌은 마을 중심부의 이름 없는 작은 사거리 한 쪽 귀퉁이에 버려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 였음을 알려주는 연자방아의 맷돌. 이름도 없는 사거리의 한 귀퉁이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탐방단은 단지동맹비의 안타까움을 가슴에 담고, 크라스키노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20여만명의 한인이 거주했던 신한촌(新韓村)이 있었을만큼 당시 한인 사회의 중심지였다.

비포장도로가 태반인 길을 5시간 가까이 달려 블라디보스토크에 자정이 다 돼서야 도착한 탐방단은 숙소에 여장을 푼 뒤 피곤한 몸을 뉘였다.

다음날인 14일 아침, 빡빡한 일정 탓에 서둘러 숙소를 출발한 탐방단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9288㎞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지이자 출발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역.

안 의사가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던 블라디보스토크역. 그 당시의 역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출근 시간대라 탐방단이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분주했다. 역 건너편 공원엔 역사 속 퇴물이 돼 버린 ‘레닌’ 동상이 서 있었다. 역 주변엔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송 교수는 “블라디보스토크 역 근처의 건물은 대부분 150년 정도됐다”고 소개했다.

1909년 10월 중순경 이토 히로부미가 북만주 시찰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안 의사는 “이건 분명히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기고, 이토 사살 계획을 독립투사 정재관 김서무 등과 논의한 뒤 의병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기차로 하얼빈으로 출발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라 불리던 지역에 세워진 기념비
탐방단은 역 주변이 너무 분주해 역사에 발을 디뎌 보진 못했다. 그러나 안 의사가 하얼빈으로 향하기 위해 기차에 올랐을 당시와 변함없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 의사의 굳은 결의를 느끼기엔 충분한 듯 했다.

탐방단 부기장인 이세영(23세, 성균관대 고분자시스템공학과 3년)양은 "비록 안 의사님이 걸었던 (블라디보스토크) 역내를 밟아보진 못했지만, 비장한 각오와 결의를 뒤로 하고 떠나신 안 의사님의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탐방단은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민족적 감상´을 마친 뒤 신한촌으로 이동했다. 신한촌은 새로운 조국을 꿈꾸며 선조들이 붙인 이름이다. 안 의사도 신한촌의 거리 거리에서 항일독립투쟁의 구슬땀을 흘렸을 터.

그러나 탐방단이 방문한 신한촌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신한촌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모두 중앙아시아로 쫓겨났고, 옛 소련정부가 그 곳에 고급 아파트 단지를 만들었기 때문.

20여만 명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선조들은 물론 안 의사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이, 단지 세 개의 흰색 기둥으로 된 기념비만 남아 탐방단을 맞이했다. 송 교수는 "이 기념비는 1999년 8월 15일에 고려인 3세가 주도해 세워졌다. 이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60여년이 걸렸다"고 소개했다.

기념비에 새겨진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聖戰)이다”라는 글귀는 탐방단의 마음을 숙연케 했다. 탐방단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선열들에게 고개숙여 넋을 기렸다.

탐방단은 독수리 언덕에 올라 태평양함대사령부와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 항이 있는 금각만을 둘러본 것을 마지막으로 러시아 일정을 마무리하고, 크라스키노를 거쳐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등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중국으로 향했다.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금각만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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