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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혁명적 개혁을 보고 싶다면


입력 2014.07.26 10:16 수정 2014.07.27 18:04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유럽에 미치다 16-바티칸>신과 인간 세계 경계로 떠나는 여행

로마 지도. 구글 맵 로마 지도. 구글 맵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세계 12억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기둥이며 하느님의 대변자, 2000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개혁적이고 파격적인 교황. 불과 1년 4개월 만에 국가와 인종, 종교와 사상을 떠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인 프란치스코 교황. 그로 인해 세계인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는 곳 바티칸(Citta del Vaticano).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의 국가로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가톨릭 = 바티칸’이라는 등식으로 생각하면 바티칸의 역사가 무척 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바티칸이 국가로 공식 인정된 것은 20세기가 시작하고도 30여년 가까이 지난 1929년부터다.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무솔리니와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의 명을 받은 가스 페리 추기경이 산죠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라테란 협정에 사인하면서 로마 교황청, 즉 바티칸 시국이 탄생한 것이다.

바티칸 지도.  구글맵 바티칸 지도. 구글맵

내가 바티칸을 처음 간 10월은 청명하고 밝고 맑은 날의 연속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로마의 가을은 달고 신선한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듯 상큼했다. 세상의 그 어떤 여행이 행복하지 않을 리 없지만 물감을 풀어놓은 듯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로마의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행복했다.

바티칸으로 가기 위해서는 로마 대중교통의 중심 테르미니 역(Stazione Centrale Roma Termini)에서 메트로 A선을 타고 오타비아노(Ottaviano) 역으로 간다. 로마에는 단 2개 노선의 지하철이 있다. A선과 B선이 그것인데, 워낙 도시 여기저기에 아직도 미발굴된 고대 유적이 많은 탓에 함부로 지하철 공사를 할 수 없어서 단 2개의 지하철 노선만을 두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노선인 C선이 공사 중이긴 한데, 착공한 지 무척 오래됐지만 공사 중 고대 유적이 발견되는 통에 공사 속도가 무척 늦다. 금년 6월 개통 예정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뿐 아직도 개통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바티칸 박물관 벽 아래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 ⓒ이석원 바티칸 박물관 벽 아래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 ⓒ이석원

바티칸과 로마의 경계에는 높고 튼튼한 벽이 놓여 있다. 말하자면 국경인 셈이다. ⓒ이석원 바티칸과 로마의 경계에는 높고 튼튼한 벽이 놓여 있다. 말하자면 국경인 셈이다. ⓒ이석원

낡고 오래된 지하철을 타고 채 20분을 달리면 오타비아노 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지하철을 나와 리소르지멘토 광장을 거쳐 약 5분 정도를 걷다보면 어마어마한 담벼락이 눈앞을 막아서는데 말하자면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국경인 셈이다.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자의 기를 죽이는 것은 ‘어마무시’한 줄이다. 파리의 에펠탑이나 베르사유 궁전을 가본 사람이라면 이미 경험해 본 일이긴 하겠지만 바티칸에 들어가려고 선 줄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나마 평일 이른 아침이면 1시간 정도 줄을 서는 것으로 통과의례를 치르겠지만, 만약 7, 8월의 수요일과 주말이라면 바티칸에 입성하기 위해 적어도 반나절 줄서기는 감수해야 한다.

바티칸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다. 가톨릭 로마대교구의 교구장이기도 한 교황이 국가의 수장이며 인구는 겨우 900여 명. 물론 대부분이 사제와 수녀들이다. 바티칸은 과거 교황의 거처였던 바티칸 궁전을 개조한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과 세계 최대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그리고 산 피에트로 광장(Piazza San Pietro)과 시스티나 경당(Capella Sistina) 등으로 구성된다. 바티칸의 치안은, 공식적으로는 1506년부터 스위스의 용병 100여명이 맡고 있다. 이들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멋드러진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현재 이들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고 실제 바티칸의 경비는 로마 경찰이 담당하고 있다.

바티칸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정문. 입장할 때 삼엄한 경비를 거쳐야 하는데, 카메라는 들고 들어갈 수 있지만 삼각대를 반입이 금지 돼 있다. 입구에 보관시켰다가 바티칸을 나갈 때 찾아야 한다. ⓒ이석원 바티칸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정문. 입장할 때 삼엄한 경비를 거쳐야 하는데, 카메라는 들고 들어갈 수 있지만 삼각대를 반입이 금지 돼 있다. 입구에 보관시켰다가 바티칸을 나갈 때 찾아야 한다. ⓒ이석원

바티칸 여행의 시작은 바티칸 박물관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사람들이 즐기는 표현 중 ‘세계 몇 대’라는 것이 있는데, 바티칸 박물관은 세계 3대 또는 4대 박물관이라고 일컬어진다.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레미타쥐까지. 그 중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품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과 더불어 바티칸 박물관이 최고 수준이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3개의 위대한 조각품이 있다. 기원전 1세기 때 고대 그리스의 아폴로니우스가 조각했다는 사지가 절단된 남성 인체 조각인 ‘토르소(Torso)’와 고대 그리스 트로이의 사제인 라오콘이 두 아들과 함께 바다에서 올라온 두 마리 뱀과 사투를 벌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조각해 놓은 ‘라오콘(Laocone)’, 그리고 산 피에트로 대성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피에타(Pieta)’가 그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인체해부학적으로 가장 완벽하다고 이야기한 '토르소'. ⓒ이석원 미켈란젤로가 인체해부학적으로 가장 완벽하다고 이야기한 '토르소'. ⓒ이석원

미켈란젤로 3대 조각으로도 불리는 '피에타'. ⓒ이석원 미켈란젤로 3대 조각으로도 불리는 '피에타'. ⓒ이석원

이중 미켈란젤로와 인연이 있는 작품은 ‘토르소’와 ‘피에타’. ‘토르소’는 미켈란젤로가 로마 시내 ‘카라칼라 욕장’에서 발굴했는데,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적으로 가장 완벽한 인체라고 극찬했다. 나중에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의 몸을 그릴 때 토르소를 모델로 삼았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4살의 나이에 조각한 것으로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가 숨을 거둔 예수님을 안고 있는 조각이다. 처음 피렌체에서 발표했을 때 아무도 이 작품을 젊고 치기어린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고 믿지 않았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의 옷깃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버렸다. 하지만 나중에 기도를 하다가 “이 작품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다”는 깨달음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깊이 용서를 구하고 이후로 다시는 자신의 그 어떤 작품에도 서명을 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품인 '라오콘'은 사실적인 묘사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석원 고대 그리스의 조각품인 '라오콘'은 사실적인 묘사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석원

바티칸 박물관 정원 중 하나인 ‘벨베데레의 뜰(Cortile del Belvedere)’에 있는 ‘라오콘’은 고대 그리스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가 충격적이다. 1506년 네로 황제의 ‘황금의 집’에서 발굴된 이 작품은 신의 저주로 뱀과 사투를 벌이는 라오콘의 참담해하는 표정이 너무 사실적이라 전 세계에서 조각을 공부하는 미술학도들의 영원한 교과서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도 꼼꼼하게 작품들을 감상하려면 한 두 달 가지고도 모자르다고 한다. 심지어 예르미타쥐에 걸려있는 250만 점의 그림과 조각은, 한 작품당 1분씩만 감상해도 잠 안자고 밥 안먹고 5년 가까이 봐야한다. 바티칸 박물관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언쯧 작고 초라해보이기까지 하는 시스티나 경당. ⓒ이석원 언쯧 작고 초라해보이기까지 하는 시스티나 경당. ⓒ이석원

시스티나 경당은 식스토 4세 교황의 명을 받은 건축가 죠반니 데 도르티의 설계로 1473년에 착공해 1481년에 완성됐다. 이곳은 일반 신자들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교황이 기도하는 곳, 교황과 추기경들이 미사를 드리던 곳이다. 또 이곳에서는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가 열린다. 80세 이하의 전 세계 추기경들이 모여 만장일치 방식으로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동안 추기경들은 완전 감금 상태가 되고, 하루 한 번 빵과 포도주와 물만 제공받는다. 새 교황이 선출되면 시스티나 경당의 창문을 통해 흰 연기가 오르고, 교황이 선출되지 못했으면 검은 연기가 오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스티나 경당을 찬란하게 만든 것은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프레스코화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 작품으로 통하는 이 두 작품은 아주 특별한 계기로 탄생하게 됐다.

미켈란젤로의 역작 '천지창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정 프레스코화로 불리기도 한다. 성경 창세기 전반부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노아의 홍수까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석원 미켈란젤로의 역작 '천지창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정 프레스코화로 불리기도 한다. 성경 창세기 전반부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노아의 홍수까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석원

16세기 초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설에 열을 올리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깊이 신뢰하는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시스티나 경당 천정에 그림을 그릴 화가를 추천하라고 한다.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를 추천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추천한 것이다. 시스티나 경당의 천정은 800제곱미터나 됐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켈란젤로가 완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브라만테의 음흉한 속을 모른 채 교황은 1508년 피렌체에 있던 미켈란젤로를 불러 천정화 작업을 지시했다.

그런데 인체의 해부학적 사고를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을 받던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원래 평면 미술인 회화를 무시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교황에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탓인지 천정화를 그리는 4년(1508~1512) 동안 무려 3번이나 작업을 중단하고 피렌체로 도망을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교황은 다독이기도, 협박하기도, 심지어는 미켈란젤로를 내주지 않는 피렌체에 대해 전쟁 위협까지 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미켈란젤로는 천정화를 완성했고, 평생 회화를 무시하고 천하게 여겼던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이 미켈란젤로의 손을 빌어 그렸다’는 ‘천지창조’를 남기게 된 것이다. 물론 4년 동안 천정 밑에 작업대를 설치하고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목에는 심각한 디스크가 생기고, 떨어진 물감이 눈에 들어가 한쪽 눈을 실명하기까지 했지만.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서만은 이탈리아 보다 일본이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500 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위대한 예술품을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완벽히 복원한 것은 일본이다. 1982년 일본 NHK가 900억 원의 돈을 들여 9년 동안 복원한 것이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미술품 복원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현재 이 그림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2009년 인근 산타첼로 성 지하에서 다량의 폭약이 폭발했는데 그 때 충격으로 그림의 한 장면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하지만 교황청은 더 이상의 복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도 이 그림 역사의 일부라며.

시스티나 경당 전면부 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역작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경당에는 인류의 창조와 종말이 공존하는 셈이다. ⓒ이석원 시스티나 경당 전면부 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역작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경당에는 인류의 창조와 종말이 공존하는 셈이다. ⓒ이석원

‘최후의 심판’은 정면 벽화다. ‘천지창조’가 33살의 젊은 미켈란젤로가 4년 동안 그린 그림이라면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가 60이 다 된 나이에 시작해 7년 만에 완성한 그림이다. 율리우스 2세가 선종한 후 교황이 된 클레멘스 7세가 1533년 미켈란젤로에게 명령해 시작된 이 그림은, 그러나 1534년 클레멘스 7세가 선종하자 중단됐다가 뒤이은 바오로 3세가 1535년 피렌체로 돌아간 미켈란젤로를 다시 불렸고, 마침내 1541년 그림이 완성됐다.

하지만 처음 이 그림이 공개됐을 때 교회와 로마 시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그림 속 모든 인물들이 생식기를 그대로 드러낸 완전 나체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신성모독이었던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율리우스 2세에 이어 다음 교황까지도 자기가 싫어하는 그림을 그리게 한 것에 대해 미켈란젤로가 앙심을 품고 한 짓이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심지어는 미켈란젤로가 루터교로 개종을 했다는 소문과 함께 하마터면 종교재판에 넘겨질 뻔도 했다.

역대 교황들이 집무실이 있는 시스티나 경당에서 산 피에트로 대성당으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걸어다니던 계단. 그래서 일명 '교황의 계단'이라고 불린다. ⓒ이석원 역대 교황들이 집무실이 있는 시스티나 경당에서 산 피에트로 대성당으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걸어다니던 계단. 그래서 일명 '교황의 계단'이라고 불린다. ⓒ이석원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나뉘어진 그림은 그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묘사에 있어서 완전히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바오로 3세는 이 그림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그림 속에 슬쩍 교황의 모습을 넣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죽기 직전인 1564년 1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비속한 부분들을 다 가려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앞 둔 미켈란젤로는 그림에 덧칠하기를 거부했고, 그의 제자가 생식기 부분에 옷을 입히게 됐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초대 교황이자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처음에는 초라하게 지어진 성당이었는데,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명으로 1506년부터 대대적인 개축이 시작돼 무려 120년 동안 증개축을 해 길이 211.5m, 높이 45m의 세계 최대 성당이 완성된 것이다. 이 성당의 증개축에 동원된 건축가만 해도 브라만테를 시작으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거쳐 베르니니 등에 이른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성스러운 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순교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석원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성스러운 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순교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석원

그러나 이 성당은 16세기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했다. 성당의 증개축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청은 전 유럽에서 면죄부라는 것을 발행했고, 이에 부당함을 느낀 마틴 루터가 1517년 이른바 ‘95개 조의 반박문’이라는 것을 발표하며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또 성당에 쓰인 대리석은 고대 로마의 유적에서 떼어낸 것으로 문화유산을 해치는 일도 벌어졌다.

아무튼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들어서면 그 웅장함에 우선 압도된다. 성당 입구 3개 문 중 오른쪽 문은 ‘성스러운 문’이라고 불리는데 25년 마다 오는 성년(聖年)에만 열린다. 지난 2000년에 열렸다니 2025년에나 다시 열린다.

세계에서 가잔 큰 규모의 성당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내부는 길이가 187m에 달한다. 엄청난 조각품과 그림 등의 미술품들이 전시돼 성당인지 박물관인지 구분이 어려운 정도다. ⓒ이석원 세계에서 가잔 큰 규모의 성당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내부는 길이가 187m에 달한다. 엄청난 조각품과 그림 등의 미술품들이 전시돼 성당인지 박물관인지 구분이 어려운 정도다. ⓒ이석원

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부에는 역대 교황들의 묘지가 있다. ⓒ이석원 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부에는 역대 교황들의 묘지가 있다. ⓒ이석원

대성당의 쿠폴라 안쪽에 있는 청동기둥. 1642년 베르니니가 바로크 스타일로 만든 것. 그런데 제작 당시 청동을 로마의 판테온에서 뜯어와 로마 시민들이 "야만인도 하지 않는 짓을 베르니니가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석원 대성당의 쿠폴라 안쪽에 있는 청동기둥. 1642년 베르니니가 바로크 스타일로 만든 것. 그런데 제작 당시 청동을 로마의 판테온에서 뜯어와 로마 시민들이 "야만인도 하지 않는 짓을 베르니니가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석원

성당 안은 길이가 187m나 된다. 성당 입구 오른쪽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있고, 중앙을 걸어 앞으로 가면 오른쪽에 베드로 성인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의 발 부분을 보면 유독 반질거리는데, 성인의 발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말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씩 만지는 탓에 반질반질 해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면 이탈리아의 위대한 조각가인 베르니니가 만든 청동 기둥이 있다.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성당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지하에는 미국의 나사에서 제작한 유리 상자 안에 베드로 성인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그 중앙 맨 앞에 교황의 제대와 베드로 성인의 옥좌가 놓여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쿠폴라. 로마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도 여기에 있다. ⓒ이석원 미켈란젤로가 만든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쿠폴라. 로마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도 여기에 있다. ⓒ이석원

대성당 쿠폴라의 내부는 한층 더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석원 대성당 쿠폴라의 내부는 한층 더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석원

성당의 외부도 대단하다. 성당의 지붕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쿠폴라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고향인 피렌체에 있는 두오모, 즉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쿠폴라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산 피에트로 광장을 비롯해 로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1655년 교황 알렉산드로 7세가 베르니니에게 의뢰해 건축한 산 피에트로 광장은 가운데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도리아식 기둥 284개가 광장을 두르는 반원형 구조다. 그런데 이 광장은 묘한 기하학적 비밀을 가지고 있다. 광장 가운데 표시된 지점에 서서 기둥들을 보면 4열 씩 30행으로 세워진 기둥들이 모두 하나로 겹쳐 보인다. 베르니니의 기가 막힌 설계가 만들어낸 신비로움이다.

산 피에트로 광장의 모습. ⓒ이석원 산 피에트로 광장의 모습. ⓒ이석원

그러나 이 광장은 현재 로마를 찾는 전 세계의 가톨릭 순례자들은 물론,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교황 프란치스코로 인해 가장 관심이 몰리는 곳이다. 30만 명의 인원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주일 미사를 마치고 나면 성당 발코니에 잠시 모습을 비추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매주 수요일 오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광장으로 나와 군중들을 만나는 일반 알현이 이뤄진다. 전임인 요한 바오로 2세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경우 방탄유리 차량에서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정도 만남을 가졌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무런 경호 장치가 없는 무개차에서 일부 군중들과 악수를 나누기도 하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대고 축복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차에서 내려 군중들과 스킨십을 시도하기도 한다. 종교를 떠나 산 피에트로 광장을 찾은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인도의 바라나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티베트의 라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각 종교들이 가장 신성시하고 반드시 순례하려고 하는 곳들 중 바티칸은 그 위치가 유럽이라는 점, 그리고 기독교가 유럽의 역사와 함께 한다는 점에서 기득권을 가진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욕이라는 단어가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신의 권위가 인간의 권리를 압도해 신의 이름으로 온갖 잔인한 만행과 인간성 말살이 빈번하게 이뤄지던 역사, 하느님의 대리인이라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제3 세계를 침략하고 착취하고 말살하던 교황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만들어 낸 것 또한 기독교라고 봤을 때 영욕은 더 없이 기독교를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대성당 쿠폴라에서 본 산 피에트로 광장과 로마 시내의 모습. 이곳에서는 현재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뜨거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석원 대성당 쿠폴라에서 본 산 피에트로 광장과 로마 시내의 모습. 이곳에서는 현재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뜨거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석원

그런데 최근에 와서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가톨릭은 거의 혁명적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도 순전히 정점에 있는 지도자 한 사람으로 인해. 일체의 순명을 목숨보다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가톨릭 성직자들조차 당황하고 두렵게 만드는 그 혁명적 변화는 남미의 가난한 예수회 소속 사제로 인해 현실이 돼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바티칸은 또 다른 변화를 겪고 있다. 산 피에트로 광장에 모인 수십만의 인파가 하나의 종교를 지향하지도, 같은 민족이거나 국가, 인종도 아니면서 공통의 관심사를 앙망하는 것. 그래서 바티칸은 더욱 뜨거운 순례지가 되고 있다.

20여일 후면 한국을 찾는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바티칸은 점점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바티칸으로의 여행이 새삼 더 특별해지는 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신의 영역 속에 있던 곳을 인간의 안식처로 만들어가는 것, 거기서 바티칸의 특별함은 불과 1년 4개월 만에 아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글/이석원 여행작가·기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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