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을 죽다 살아난 장성택, 김정일에 절대복종했다

김수정 기자

입력 2014.02.02 10:13  수정 2014.02.02 10:19

소식통 "김정일 생전에 장성택 한마디도 못해 결정권 없음 반증"

"지위와 자산 유지 위해 남을 하루 아침에 내치는 비열한자 불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시절 '2인자'로 불리던 장성택이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격 처형됐지만 앞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 그는 4차례나 숙청이 됐다가 부활한 전력이 있다.

장성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아첨 기질을 발휘한 덕분으로 그는 외부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김정일의 말에는 절대 복종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아첨꾼이었던 장성택은 사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측근이라도 하루아침에 내쳐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아 간부들 사이에서 인식이 나빴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2월 장성택의 실권 소식을 처음으로 전한 대북소식통은 “일각에서 과거 김정일이 운영하던 비자금을 장성택이 김정은에게 제대로 넘기지 않아 두 사람 사이 갈등이 생겼다고 분석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김정일은 장성택에게 자금관리 업무를 맡긴 적이 결코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물론 장성택은 부마로서의 위치는 인정받았다. 중앙당 비서도 그 앞에선 허리 굽혀 인사할 정도는 됐다”면서도 “이는 그가 엄청난 권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 당 비서의 남편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켜준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소식통은 장성택과 관련된 한 일화를 언급, 실제로 장성택이 청탁을 받고 수락했다가 김정일의 지침 한마디에 이틀만에 이를 번복할 정도로 별다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점을 소개했다.

2009년 김정일의 지시로 평앙시 보안국이 중앙당을 집중 검열한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60대 후반이던 보안부장이 뇌물 혐의로 체포됐다. 보안부장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장성택 측근을 총 동원했다고 한다. 물론 뇌물로 간부들을 회유하려던 것이다.

돈 좋아하기로 유명한 장성택과 직접 면담이 성사되려던 마지막 순간, 때마침 김정일은 ‘평양시 보안국 검렬문제에 개입하면 더 엄중히 처벌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 말 한마디에 보안부장의 구명 운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2010년 5월 보도한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방문 당시의 모습.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뒷편으로 장성택이 보인다.ⓒ연합뉴스

흥미로운 점은 이때 평양시 보안 검열에 파견됐던 핵심 책임자가 조연준 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었는데 당시 장성택이 조연준에게 ‘사정을 검토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다.

결국 보안부장은 물론 두 아들도 청탁 혐의가 포착돼 모두 직위에서 물러나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소식통은 “김정일 생전에 장성택은 그의 말에 어떠한 개입이나 반기도 들지 못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장성택이 권력자가 아니었다는 방증이 된다”며 “당 내부에서 어떠한 결정권도 없었으며 김정일 앞에서 자기 주장을 내놓은 적이 없던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북한에서는 장성택이 2인자라고 평가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물론 장성택을 고위급 인사로 보기는 했지만 결코 실세는 아니었다”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이유로 북한 간부들은 장성택 뒤에서 그를 폄하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들은 돈과 여성을 향한 장성택의 과도한 탐욕만큼이나 사익을 위해서는 자신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내쳐버리는 인격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소식통은 “장성택은 자신의 지위와 자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때때로 남을 짓밟아서라도 사익을 챙겼던 사람”이라며 “심지어 자신의 심복들도 여차하면 단칼에 잘라버릴 정도로 야비한 면모가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특히, 장성택으로 인해 간부로 발탁돼 충심을 보이던 인사들 상당수가 최후에는 장성택의 버림을 받고 총살당했다”며 “이 때문에 간부들은 그를 점점 신뢰하지 못했고 자칫 그의 주변에 머무르면 자신도 숙청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장성택을 멀리했다”고 말했다.

다만, 소식통은 “이와는 반대로 공적인 사안에는 자신의 소신 내세우는 사람 못 됐다. 그나마 그가 2011년까지 갖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곁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아첨실력 덕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소식통은 김정일 사망 이후 장성택이 고모부로서 거들먹거리면서 주변세력을 키운 것이 그의 비운의 말로를 재촉한 것으로 평했다.

그는 “평소 그를 눈엣가시로 본 간부들은 이번 숙청과 처형까지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장성택은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물을 국제사회나 국내 언론이 그동안 영웅으로 만들어줬다”고 덧붙였다.

한편, 장성택 처형 이후 그의 친인척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장성택의 누이인 장계순과 매형인 전영진 쿠바 대사, 장성택의 조카인 장용철 말레이시아 대사와 그의 아들인 20대 중반의 태령·태웅은 작년 12월 초 평양으로 소환돼 처형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정부나 정보기관도 "확인이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소식통은 “북한은 장성택 숙청 이전부터 주변인물들을 서서히 쳐내기 시작했다"면서 "북한에선 고위급 간부를 숙청까지는 아니더라도 쳐내고 싶을 때 해외 주재 대사로 보내는 일이 흔하다. 5년 전 장성택 최측근이자 조카인 장용철을 말레이시아로 보낸 것에서 장성택의 종말이 시작된 셈"이라고 말했다.

즉, 북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장성택을 숙청하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외국에 대사로 보내거나 소리 소문 없이 처형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는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폴란드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로 나간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며 “다른 나라와 달리 북한에서는 해외 주재 대사로 내보내는 것으로 숙청을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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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기자 (hohokim@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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