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영환 민주당 의원의 주최로 열린 '햇볕정책 발전적 계승, 어떻게 할 것인가?'토론회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기획과 실행에 핵심적 역할을 한 라종일 전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이 강연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김대중 정부 당시 햇볕정책 기획자이자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라종일 박사가 2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실은 장성택이 차지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라 박사는 이날 오전 국회 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김영환 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햇볕정책 설계자에게 듣는다. 햇볕정책 발전적 계승, 어떻게 할 것인가’의 강연자로 나서 햇볕정책에 대한 설명 및 질의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라 박사는 “김일성, 김정일 사망 후에 외국인들이 내게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느냐’고 묻기에 ‘내 생각에는 장성택이 가장 위험할 것 같고, 약 2년 뒤에 숙청되지 않겠느냐’고 했었다”면서 “그걸 한 영국 특파원이 보도로 낸 것이다. 나갔으면 안됐는데”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장성택이 숙청된다고 본 이유는, 1년 정도 지나면서 김정은 권력과 갈등이 생길 것이었기 때문”이라면서 “나는 장성택이 망명가기를 바랐다”고 덧붙였다.
특히 라 박사는 엘바섬으로 유배됐던 나폴레옹이 1815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 왕관은 내가 빼앗은 게 아니라 하수구에 버려져있던 것을 주워 쓴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뒤 곧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사실은 장성택이 차지할 수있었다"고 언급해 참석자 전원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는 장성택 관련 발언을 하는 중간 중간 난처한 듯 웃음을 지으며 재차 머뭇거렸고, 곧장 김 의원이 “거기까지 하겠습니다”라고 화제를 돌리면서 간접적으로 제지했다.
아울러 라 박사는 인도적 지원 시마다 통일 이야기를 꺼낼 경우, 남북 관계에 긴장을 조성한다고 지적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같은...”이라며 말잇기를 망설이다가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되죠”라고 웃어넘겨 궁금증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 “남북은 모두 70년간 상당히 공고화된 권력 체계다. 즉, 통일 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잃게 된다. 그런 걸 고려해야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게 '사람이 잘 사는 방향'으로 통일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햇볕정책, 업그레이드 아닌 다운그레이드 해야" 휴먼 아젠다 강조
이날 강연회에서는 햇볕정책의 문제점과 더불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도 이어졌다.
라 박사에 따르면, 향후 햇볕정책은 △전략·정치적 아젠다보다 휴먼 아젠다에 근거해야 하며 △민생교류를 중심으로 업그레이드 아닌 다운그레이드 필요 △교류·지원하되 통일을 지나치게 거론하지 말고 △인권문제는 늘 제기하는 동시에 남북관계 파탄으로 몰지 않도록 하며 △북한을 가르치려는 자세를 지양할 때 장기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가 ‘반성할 점’으로 우선 지적한 것은 햇볕정책이 휴먼 아젠다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
이에 대해 라 박사는 이솝우화와 성서의 마태복음 내용을 비교하며 햇볕정책 개념이 ‘사람의 문제’로 재설정 되어야함을 역설했다.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는 이솝우화 중 ‘사나이의 외투를 벗긴 햇볕’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 자체가 전략적 개념으로 접근했다는 의미다. 오히려 마태복음 5:44~45절에 ‘하나님이 악한 사람, 선한 사람,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내용에 근거, 전략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순수한 도움을 방향으로 설정했어야 한다는 것.
라 박사는 이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하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한다”며 “식량과 의료문제 등을 협력해 사람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덜어주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순수하게 돕자는 것이다. 지금 당장 통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 보다는...”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최민희 의원 등이 인권 관련 자료의 부정확성과 인권문제 전달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라 박사는 오히려 의원들의 직관과 통찰력을 요구했다.
라 박사는 “정확한 자료는 애당초 없다. 그래서 정보의 현실적 간극과 정치적 결단 사이에서 정치 지도자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면서 나폴레옹은 중요한 상황에 자신의 허벅지가 떨리는 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았던 예화도 소개했다.
그는 이어 "인권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뉴얼이 아닌 도덕적 판단이며, 특히 북한의 비상사태 같은 경우엔 매뉴얼이 아무 소용 없다"면서“정치인과 정치조직이 순발력과 직관을 발휘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곧 조직의 우수성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라 박사는 또 최소 10년 이상 민간 차원의 교류를 통한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최고 지도자들끼리 협력하면 '정치 이슈'가 되어버린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현실에서의 운영과 영향에 관한 실증적 확인의 결함이 있었다. 교류 한다 해도 인권 문제는 반드시 늘 제기했어야 한다”고 재차 지적했다.
이날 오전 7시 30분부터 시작된 강연회에는 주최자인 김 의원을 비롯해 변재일, 노웅래, 김기준, 원혜영, 황주홍, 최민희, 민홍철, 정성호, 홍익표, 이학영, 신학용, 추미애, 최원식 의원 등이 참석했다.
한편, 같은 날 정성호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새누리당과 북한인권법 관련 논의를 시작하기로 구두 합의했다고 밝혔다.
단,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의 ‘2월 임시국회 내 처리 합의’주장에 대해서는 “논의의 틀을 만들어보자고 한 것일 뿐 처리한다는 합의는 없었음을 분명히 밝힌다”라며 선을 그었다. 민주당은 ‘햇볕정책 2.0’ 작업의 일환으로 ‘민주당판 북한인권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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