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에 멈춘 인수…14년 만에 2조 재도전
필리조선소 품고 美 해군 정비·설계·건조까지
한국형 차기 구축함 수주…KAI로 하늘도 겨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가운데)과 김동관 수석부회장(왼쪽·당시 부회장)이 지난 1월 한화 제주우주센터를 찾아 지구 관측용 고해상도 합성개구레이다(SAR) 위성의 실물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한화그룹
6조3002억원과 2조원. 한화가 14년 간격을 두고 대우조선해양 앞에 내놓은 두 개의 숫자다. 앞의 숫자는 김승연 회장 시절의 것이고, 뒤의 숫자는 김동관 한화그룹 수석부회장이 이끈 재도전의 것이다.
2008년 11월 한화는 산업은행 등이 보유한 대우조선해양 주식 9639만주를 6조3002억원에 사들이기로 하고 이행보증금 3150억원을 냈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기면서 인수는 이듬해 6월 최종 결렬됐다. 한화는 긴 소송 끝에 2018년 서울고법에서 보증금 일부인 1260억여원을 돌려받으라는 판결을 받았다.
14년 만의 재도전
4년 전인 2022년 9월 26일, 한화는 다시 대우조선 앞에 섰다. 이번에는 산업은행 지분을 사는 대신 대우조선이 새로 발행하는 주식을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한화는 2조원 유상증자로 지분 49.3%를 확보하는 조건부 투자합의서를 맺었다.
그해 8월 당시 부회장으로 승진한 김 수석부회장은 9월부터 인수에 본격 나섰다. 증자 대금의 절반인 1조원은 그가 이끄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댔다.
2022년 영업손실 1조6136억원, 부채비율 1542.4%였던 회사의 숫자는 차례로 뒤집혔다. 2021~2023년 3년 연속 영업적자를 냈던 회사는 2024년 영업이익 2379억원으로 흑자전환했고 지난해에는 1조1676억원을 올렸다.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1조1772억원으로 작년 한 해 이익에 맞먹는 규모를 반년 만에 벌었다. 반기 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은 대우조선해양 시절을 포함해도 역대 최대다.
6월 말 기준 앞으로 건조해 인도할 일감(수주잔고)은 153척, 337억7000만 달러다. 이 중 영하 162도로 액화한 천연가스를 실어 나르는 고부가가치 선박인 LNG운반선이 40%를 넘는다.
회사 가치가 오르자 산업은행도 공적자금 회수에 나섰다. 산업은행은 지난해 4월 한화오션 주식 1300만주를 시간외 대량매매(블록딜)로 팔아 1조615억원을 거둬들였다. 2000년 빌려준 돈을 주식으로 바꿔(출자전환) 지분을 확보한 지 25년 만의 첫 매각이었다.
김동관 한화그룹 수석부회장(당시 부회장)이 지난해 8월 26일(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시의 한화필리조선소에서 열린 선박 명명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한화그룹
거제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국내 방산의 판도도 바뀌었다. 한화오션은 지난 7월 방위사업청과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본계약을 맺었다. 계약금액은 8380억원으로 2032년까지 선도함을 해군에 인도한다. 7000톤(t)급 구축함 6척을 국내 기술로 확보하는 사업으로, 적 미사일과 항공기를 동시에 추적·요격하는 이지스급 함정을 처음으로 국산화한다. 9월에는 태국 해군 차기 호위함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도 선정됐다.
바다 건너 무대의 출발점은 정비였다. 한화오션은 2024년 국내 조선사 최초로 미 해군 군수지원함 '월리 쉬라'호의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따냈고 같은 해 12월 한화시스템과 함께 1억 달러에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다. 미 해군 함정의 해외 건조를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미국 법 아래에서 현지 생산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필리조선소는 김 수석부회장이 직접 챙기는 현장이 됐다. 지난해 7월 미 해군장관 등이 방문했을 때 이들을 직접 맞은 그는 미국 내 신규 조선소 건설과 인력 양성, 공급망 재구축 등을 한화가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한 달 뒤 한미 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명명식에서는 "미국 조선산업의 새로운 장을 함께 할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화는 이 무렵 5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연 1척 수준이던 건조 능력을 20척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올해 3월에는 한화필리조선소와 한화디펜스USA가 함정 설계업체 바드(VARD)의 협력사로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NGLS) 개념설계에 참여했다. 한국 기업이 미국 현지 조선소를 기반으로 미 해군 함정 설계에 참여한 첫 사례다. 7월에는 필리조선소가 TOTE서비스와 함께 미사일방어청의 미사일 시험 계측선(MRIV) 건조사로 선정되면서 정비에서 설계, 건조로 영역을 넓혔다. 8월에는 한화디펜스USA가 미 해군 함정을 짓는 오스탈USA 인수를 위한 구속력 없는 예비 제안을 냈다.
육해공 퍼즐, 아직 진행 중
인수 후 한화는 흩어진 지분부터 모았다. 지난해 2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계열사들의 한화오션 지분 7.3%를 1조3000억원에 사들이기로 하고, 3월 거래를 마쳐 지분율을 30.44%로 높였다. 이달에는 한화시스템이 보유한 필리조선소 지분 60%를 한화디펜스USA 측에 약 3251억원에 넘기기로 하면서 미국 조선·방산 사업도 재편에 나섰다. 김 수석부회장은 한화오션 기타비상무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으며 올해 7월 수석부회장에 올랐다.
하늘 쪽 퍼즐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화는 장내 매입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지분 15.89%를 확보했고 지난달 말 공정위 승인을 받아 2대 주주가 됐다. 최대주주는 여전히 수출입은행으로, 경영권 확보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
2008년 금융위기에 멈춰 섰던 대우조선 인수의 꿈은 14년 뒤 아들 세대에서 다시 띄워졌다. 3년 연속 적자를 내던 회사는 1조원대 이익을 내는 조선사가 됐고 한국형 차기 구축함 건조를 맡았으며, 필라델피아에서는 미 정부 선박 건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바다를 채운 한화의 시선은 이제 하늘로 향한다. 김승연 회장이 그린 '육해공' 퍼즐이 김 수석부회장의 손에서 완성에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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