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한미 양자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공동취재단)
이재명 대통령이 뉴욕과 멕시코를 순방 중이다. 출발선에 서자마자 AP통신과 뉴욕타임스(NYT) 인터뷰를 업로드하고 취임 후 두 번째 유엔총회 일반토의(General Debate) 연설대에 올랐다. 그리고 뉴욕 일정의 대미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30분짜리 회동을 가졌다.
대통령의 무모한 북핵 해법
숨가쁜 일정에서 드러난 진짜 관전 포인트는 따로 있다. 지난해 8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협력’을 꺼냈다가 북한으로부터 "비핵화 망상증에 걸린 위선자"라는 서늘한 독설을 얻어맞은 뒤 대통령은 북핵 위협 앞에 유독 말을 아껴왔다. 오로지 ‘트럼프라는 지렛대’를 통해 꽉 막힌 대화의 숨통을 틔워보겠다며 홀로 칼을 갈아온 구상이 드디어 베일을 벗게 된 것이다.
외신 인터뷰와 연설에 담긴 해법의 뼈대는 명료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능란한 줄타기로 몸값을 한껏 불린 북한을 기존의 제재만으로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으니 ‘추가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중단’이라는 미래의 빗장을 대가로 현재 옥죄고 있는 ‘대북 경제제재’를 먼저 풀어주자는 제안이다.
그렇게 미북 대화의 물꼬를 트고 남·북·미·중 4자 평화체제 회담을 거쳐 일본과 러시아까지 아우르는 다자 협의체로 확대해 동북아 공동번영의 청사진을 그리겠다는 원대한 기획이다. 하지만 겉보기엔 그럴싸한 이 페이스메이킹은 우리 안보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 치명적 자충수다.
북핵 인정은 한국의 협상 자격 박탈로 이어진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대통령의 북핵 해법은 북한의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안보 협상의 장외로 밀려나는 덫에 빠지게 한다.
혹자는 "북한이 이미 핵을 쥐고 흔드는데,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없는 게 되느냐"고 묻는다. 현실 진단으로는 맞는 말이다. 국가안보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워스트 케이스(Worst Case)' 접근이 철칙이어야 하므로 현실적 위협에 대비한 억제력 확보는 당연히 1순위다.
그러나 안보 전략과 외교 협상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방정식이다. 국제정치에서 핵확산금지조약( NPT) 체제를 벗어나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공인해 버리는 순간, 대북 제재와 감시망은 존재 명분을 통째로 상실한다. 더 치명적인 것은 남북 간 군사안보 협상 테이블 자체가 폭파된다는 점이다.
북한은 즉각 "핵문제는 동급의 핵보유국끼리 담판 지을 일이니 비핵국가 한국은 빠지라"라며 우리를 노골적으로 배제할 것이다. 안방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를 두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외교적·규범적 차원에서라도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만한 표현은 끝끝내 거부해야 마땅하다.
결국 '과거 핵'이 핵심이다
대통령은 미래 핵 중단의 대가로 제재 해제를 제안한다. 그런데 30년 북핵 외교사에서 ‘과거핵’을 털어내지 못한 미봉책은 언제나 참담한 파국으로 끝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북핵을 시계열로 쪼개보면 이미 손에 쥔 핵탄두와 플루토늄 등은 ‘과거핵’, 현재 가동 중인 영변 등의 생산 시설은 ‘현재핵’, 아직 완성되지 않은 대기권 재진입 ICBM과 미래의 증산 역량은 ‘미래핵’이다. 대통령의 구상은 아직 낳지도 않은 알(미래핵·ICBM)의 부화를 멈추겠다는 북한의 약속만 믿고, 지금 작동 중인 강력한 제재의 그물을 걷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진짜로 핵무기(물질) 생산과 ICBM 개발 개발을 멈췄는지 검증하려면 현재와 과거의 핵 능력이 투명하게 측정되어야만 한다. 과거의 기준점이 없는데 미래의 중단을 어떻게 입증하는가?
결국 이 길은 북한이 결사적으로 거부해 온 ‘과거핵 사찰(inspection)’이라는 거대한 암초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지난 1994년 제네바 합의부터 2008년 6자회담 불능화 검증, 2019년 하노이 노딜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단 한 번도 과거핵의 문을 열어준 적이 없다. 신고·검증을 위한 사찰의 잣대를 들이댈 때마다 NPT 탈퇴와 핵실험이라는 벼랑 끝 전술로 판을 엎어버렸던 것이 북핵의 잔혹사다. 검증 없는 미래핵 동결론은 이미 역사적으로 파산 선고를 받은 낡은 수표이자, 안보를 담보로 건 무모한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위협은 ICBM이 아니라 SRBM
우리 대통령이 정작 한국민의 머리를 겨누는 단거리 탄도 미사일(SRBM)은 덮어두고 미국의 관심사인 ICBM만 면죄부의 교환물로 지목한 대목은 뼈아프다. 북한이 공을 들이는 사거리 1만 km급 이상 탄도미사일은 화성-14형부터 19형까지 5종에 달하고 최근에는 고체연료 엔진까지 얹었다.
그러나 이 미사일들은 한 번도 정상 궤도로 시험 발사된 적이 없어 탄두 재진입이라는 최종 관문을 통과했는지조차 검증되지 않았다. 즉, 아직 미완성인 미국의 골칫거리를 막아주겠다며 국제사회가 수년간 쌓아 올린 촘촘한 대북 제재망을 통째로 헐어주겠다는 셈법이다.
발사되는 북한 전술탄도 미사일.ⓒ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더 큰 비극은 이 카드를 꺼내 든 주체가 미국 대통령이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집권 1기 당시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쏘아 올려도 "남들도 다 쏘는 작은 미사일"이라며 노골적인 방관자적 태도를 보인 바 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 위협적인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일지 몰라도 휴전선 이남의 서울과 도쿄를 정밀 타격하는 것은 스커드, KN-23, 초대형 방사포 같은 단거리 미사일들이다.
북한이 쏘아 올린 수많은 미사일 도발의 과녁은 오롯이 우리 머리 위였다. 자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칼날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미북 대화의 판을 깔아주겠다며 워싱턴의 안보 걱정만 앞장서 덜어주는 광경은 주객전도(主客顚倒)의 극치다.
만약(정말 있어서는 안 되지만) 미국과 북한간 핵협상이 군축협상으로 변질될 경우, ICBM 포기의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가 수용된다면 우리는 북한의 단거리 핵미사일을 혈혈단신으로 맞서야 할 것 아닌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워야 할 트럼프를 위해 우리의 안보를 희생할 것인가
이번 순방길 미국 뉴욕에서 성사된 30분간의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간 번개 회동 역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일반토의 리셉션 호텔의 별도 방에서 성사된 짧은 만남에서 트럼프는 별다른 정책적 코멘트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툭 던진 한마디는 "김정은과 여전히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런 소통이 가능한 지도자는 전 세계에 나 뿐"이라는 특유의 자기과시였다.
중간선거 국면이 지나고 워싱턴의 시선이 차기 대권 레이스로 쏠리기 시작하면 트럼프는 뉴스 헤드라인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뿐 아니라 다음 임기가 없는 미국 대통령이 의례 겪는 정치 현상이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무가치함과 싸워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싸움을 돌파하기 위해 김정은과의 깜짝 정상회담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가 자임해야 할 역할이 과연 트럼프의 정치적 흥행을 위해 북한의 콧대 높은 몸값에 맞춰 협상의 문턱을 낮춰주는 바람잡이여야 하는가?
우리 대통령이 자처한 페이스메이커의 보폭이 빨라질수록, 정작 대한민국 안보의 호흡은 가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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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인배 한반도미래포럼 수석연구위원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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