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문화공간에 쓰이는 눈·귀 접근성 기호
해외 농인단체는 신체의 제약 대신 수어하는 손 제안
국내 취재선 인식·조사 공백…장문원은 지원 내용 담은 도안 개발
9일 오전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미) 덕수궁. 이대원의 작품 ‘전설의 마을 / 곤유동 A’ 설명문 옆에는 눈과 귀 모양에 비스듬한 선이 그어진 표지가 붙어 있다. 카메라나 음식물 그림에 빗금을 그은 ‘촬영 금지’·‘음식물 반입 금지’ 표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수어와 음성해설 등 장애인의 관람 지원을 알리는 표시였다.
눈과 귀를 활용한 접근성 기호는 국제표준에도 등록돼 있다. 국제표준화기구(ISO)의 공공안내 그림기호 표준 ‘ISO 7001:2023’에는 난청인을 위한 ‘PI AC 007’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PI AC 008’이 있다. 해당 이용자를 위한 시설이나 지원이 있음을 알리는 기호로, 관람을 금지한다는 뜻과는 반대다.
이런 표현은 다른 문화공간에서도 사용된다. 영국 런던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가 지난해 사용한 큰글씨 안내책 표지에는 눈 일부를 굵은 사선으로 가린 기호가 들어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4년 개편한 으뜸홀 안내데스크에 빗금 친 귀와 알파벳 ‘T’를 함께 표시해, 보청기 등과 연동하는 청취 보조장치인 히어링루프를 안내했다. 눈과 귀를 변형한 그림으로 지원 대상을 나타내되 구체적인 서비스는 글자나 별도의 표식을 더해 구분하는 방식이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미) 덕수궁에 전시된 이대원의 작품 ‘전설의 마을 / 곤유동 A’ 설명문 옆에는 눈과 귀 모양에 비스듬한 선이 그어진 표지가 붙어 있다.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국제적으로 뜻을 공유하는 기호는 안내의 혼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뜻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표현의 적절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관람을 지원한다는 정보를 전달하면서 왜 눈과 귀의 기능이 제한된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지, 지원받는 당사자는 그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의 문제는 남는다.
해외 농인단체가 귀에 빗금을 그은 기호에 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캐나다농인협회는 2015년 7월 승인한 공식 입장문에서 귀를 가로지르는 선이 청력 손실을 결함이나 들을 수 없다는 부정적 상태로 나타낸다고 지적했다. 수어 통역이 필요한 농인과 청취 보조장치가 필요한 난청인의 서로 다른 요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했다.
기호를 고르는 과정에 당사자가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세계농인연맹(WFD)과 세계수어통역사협회(WASLI)는 같은 해 1월 승인한 재난·비상상황 의사소통 지침에서 귀에 사선을 그은 기호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명시했다. 두 단체는 각국 농인·수어통역사 단체와 협의해 기호가 당사자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에 적절한지 확인하도록 권고했다. 기호의 평가는 제공자가 의도한 뜻뿐 아니라 그 기호로 표현되는 사람들의 판단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어 접근성 기호 ‘PI AC 024’ ⓒISO
국제표준 안에서도 표현의 선택지는 넓어지고 있다. 올해 7월 ISO에 등록된 수어 접근성 기호 ‘PI AC 024’는 두 손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수어 지원을 나타낸다. 세계농인연맹이 등록을 제안한 것으로, 기존 난청인 접근성 기호와 별도로 수어 지원을 직접 알리는 기호가 추가됐다. 이는 표준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에서 나아가 안내하려는 지원 방식을 설명하는 데 어떤 표현이 적합한지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이번 취재에서 접촉한 국내 장애인 유관기관에서는 해당 기호가 낯설거나 당사자의 인식을 파악할 자료가 없다는 답변이 나왔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관계자는 기호 자체를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농아인협회 관계자는 국제표준 기호라면 이를 사용하는 것이 맞는다고 보면서도 해당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관한 인식조사는 별도로 진행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 역시 해당 기호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다른 주요 현안을 다루는 가운데 미술관·박물관 전시 관련 문제는 상대적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답변에서 드러나는 것은 기호에 대한 찬반보다 검토의 공백이다. 표준이므로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과 당사자가 그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펴보는 일은 별개다. 관련 조사가 없거나 문제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을, 당사자들이 현행 표현에 동의하고 있다는 근거로 삼기도 어렵다.
문화시설 접근성 픽토그램 48종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지원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은 올해 5월 문화시설 접근성 픽토그램 48종을 개발·배포했다. 문화시설이 제공하는 접근성 서비스를 더 명확하게 안내하기 위한 도안이다.
공개된 도안을 보면 수어는 두 손의 동작으로 표현했다. 음성해설은 풍경 그림에서 귀로 이어지는 화살표로, 문자통역은 스피커에서 글자 ‘가’로 이어지는 화살표로 나타냈다. 눈이나 귀에 빗금을 그어 이용자의 신체적 제약을 표시하는 방식과 달리 이들 도안은 어떤 방법으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같은 관람 지원을 안내하더라도 장애 유형보다 이용할 수 있는 언어와 서비스를 앞세울 수 있다는 차이가 드러난다.
장문원 측은 “개발 과정의 사용성 평가를 통해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을 반영했다”며 “문화시설에서 장애인 관객을 만나고 접근성 콘텐츠와 서비스를 기획·운영해 온 접근성 기획자와 매니저 등 전문가의 의견도 함께 수렴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기존 기호를 사용할 때도 이러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눈과 귀에 사선이 표현된 형태에 대해 “이용자와 사용 맥락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만큼 기호가 쓰이는 맥락과 안내 목적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새로 개발한 도안 역시 계속 보완할 대상이다. 장문원 측은 “접근성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며 문화시설의 환경과 이용자의 필요에 따라 픽토그램의 적용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도안을 완결된 기준으로 두지 않고 현장의 적용 경험과 이용자 의견을 수렴해 보완하겠다는 입장이다
문화공간의 안내표지는 필요한 서비스의 위치를 알려주는 동시에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을 표현한다. 듣거나 보는 데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앞세울 수도 있고 수어로 소통하고 음성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을 담을 수도 있다. 표준이라는 이유로 표현에 대한 질문까지 끝낼 수는 없다. 기호가 널리 쓰이는 만큼 그 안에 담긴 장애인의 모습도 당사자와 함께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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