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는 지배구조·거수기 관행 개선 주문…정책금융 거버넌스는 ‘비공개’
영업비밀 보호 필요하지만 공개와 기록은 별개…사후검증 장치 필요
산은 “심의내용 별도 기재 안 해”…금융위는 “충실히 관리” 엇갈린 설명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4월 9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에서 열린 신안우이 해상풍력 발전산업 PF금융 약정식에 참석해 참석자들과 기념촬영 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정부는 금융회사와 기업에 끊임없이 ‘좋은 거버넌스’를 요구한다.
금융지주 이사회가 최고경영자(CEO)의 참호 구축을 돕거나 거수기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기업에는 ESG를 강조하며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지, 중요한 의사결정이 적절한 절차를 거쳤는지를 기업가치의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정부가 직접 설계하고 국민의 돈과 국가 신용을 동원해 굴리는 정책금융의 거버넌스에는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20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를 취재하며 계속 머릿속에 남은 의문이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의 의사결정 체계를 소개할 때 ‘전문성’ ‘공정성’ ‘투명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누가 심사하고 어떤 논의를 거쳐 천문학적인 자금지원 결정을 내렸는지, 훗날 되짚을 수 있는 장치는 충분한가.
정부와 산업은행이 가장 먼저 내세우는 이유는 기업의 영업비밀이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국가 전략산업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기술력과 사업전략, 금융조건 같은 민감한 정보가 오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되는 정보’와 ‘애초에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정보’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산은의 자체 운영규정도 의사록에 ‘의사진행의 경과 및 그 결과’를 기재하도록 하면서 국가안보나 국민경제, 기업의 경영상·영업상 비밀이 포함돼 공개할 경우 정당한 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사항은 공개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규정 자체부터 ‘기록’과 ‘공개’를 구분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의 핵심기술이 들어간다면 문서를 없애거나 심의 내용을 축약하는 대신 제대로 작성한 뒤 ‘비공개’로 관리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접근 권한을 엄격히 제한하고, 기술의 민감성이 사라지거나 사업이 끝나 사후평가가 필요한 시점에 공개 범위를 다시 판단하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모든 내용을 지금 당장 국민에게 보여달라는 요구와는 다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결정한다고 해서 회의의 모든 말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경제상황을 놓고 어떤 의견이 제시됐고 왜 금리를 올리거나 내렸는지 의사록을 통해 되짚을 수 있다.
정책금융도 마찬가지다. 모든 발언을 속기할 필요는 없더라도 어떤 위험이 제기됐고, 이를 어떻게 평가했으며, 그럼에도 왜 해당 기업이나 사업에 자금을 넣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는지는 남아 있어야 한다.
신안우이 해상풍력 사업의 투자심의위원회 회의요지를 보면 이 문제가 선명해진다.
위원들은 공급망 국산화뿐 아니라 어업피해보상 등 인허가 리스크, 향후 추가 협상계획, 전남지역 송배전 문제에 따른 출력제한 가능성까지 물었다.
출력제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가정 아래 프로젝트 현금흐름의 민감도 분석을 추가 실시해 위험을 다시 점검하겠다는 답변도 나왔다.
이 가운데 어업피해보상이나 송배전 문제 같은 질문의 주제 자체는 기업의 첨단기술과는 거리가 있다.
사업의 성패와 공공성, 향후 자금 회수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위험요인에 가깝다.
더 궁금한 것은 그다음이다. 이런 위험요인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위원들은 무엇을 놓고 토론했을까.
출력제한 위험을 어느 정도로 봤고, 어업인과의 추가 협상이 사업 진행에 미칠 영향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7500억원을 지원할 만하다고 본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회의요지의 마지막은 이렇다.
“위원장은 심의 진행을 위해 안건 관계인의 퇴청을 요청하고, 의안 제1호에 대하여 출석위원의 만장일치로 의결되었음을 선포함.”
정작 안건 관계인이 나간 뒤 이뤄졌을 위원들의 판단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질문과 답변은 있는데, 그것을 토대로 돈을 넣기로 한 의사결정 과정은 한 문장 사이에서 사라진다.
회의요지라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위원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7500억원의 정책금융을 결정하는 문서라면 최소한 어떤 쟁점을 놓고 어떤 이유로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더 혼란스러운 것은 금융위와 산은의 설명이다.
산은은 국회에 제출한 공식 답변에서 기업의 경영상·영업상 비밀 등이 포함된 안건은 비공개로 심의하고 “위원들의 심의내용을 별도로 기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운영규정상 의사록은 작성하지만 비공개 안건에서는 위원의 심의내용을 따로 적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반면 금융위는 “주요 질의응답 내용 및 심의 내용도 충실히 관리되고 있다”고 밝혔다.
신안우이 사업 역시 시나리오 분석과 금융구조, 사업타당성 분석, 투자심의위원회와 기금운용심의회의 토의가 있었다고 했다.
다만 심의 내용은 영업·경영상 비밀과 금융조건 등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 있어 대외 공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심의내용을 별도로 기재하지 않는다’와 ‘심의내용을 충실히 관리하고 있지만 대외 공개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적어도 문언상 같은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금융위 설명대로 별도의 내부 기록에 실제 토의와 판단 과정이 충실히 남아 있다면 그 사실과 관리 방식부터 명확히 설명하면 된다.
어떤 문서를 작성하고 누가 접근할 수 있으며 얼마나 보존하고, 향후 감사나 국회 검증 때 어떤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지 체계를 제시하면 된다.
반대로 산은의 국회 답변처럼 핵심 심의내용 자체를 별도로 기재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나중에 지원사업이 실패하거나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을 때 최초 투자 당시 어떤 위험을 인식했고 무엇을 근거로 지원을 결정했는지 검증할 방법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국민성장펀드는 200조원 규모로 설계됐지만, 그 안에서도 특히 국가 신용이 직접 걸리는 구간이 있다. 바로 첨단전략산업기금이다.
첨단전략산업기금은 90조원 규모다. 여기서 발행하는 채권의 원리금은 국가가 보증한다. 첨단전략산업기금채권 국가보증잔액은 2030년 78조5000억원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2030년 전체 국가보증채무 전망치 157조3000억원의 절반가량이다.
이 정도 규모의 국가 신용을 동원한다면, ‘기업의 영업비밀’이라는 말만 되풀이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영업비밀 보호와 정책결정 검증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민감한 정보는 철저히 비공개로 관리하되, 훗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검증할 수 있도록 남기는 체계를 만드는 것, 그게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가 기업에는 투명한 이사회와 책임 있는 거버넌스를 요구한다. 국민성장펀드 역시 다를 이유가 없다.
‘누가, 어떻게’ 결정했는지 지금 당장 모두 공개하라는 게 아니다.
200조원 국민성장펀드, 그중에서도 국가가 신용을 직접 보증하는 90조원을 쓰면서, 적어도 나중에는 확인할 수 있게 남겨두라는 것이다.
정부가 내건 ‘공정·투명’은, 그 기록에서부터 증명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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