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욕조부터 노란봉투법까지…논란 뒤 수정·보완 반복
‘일하는 사람 기본법’도 속도전…“사후 보완보다 사전 숙의 필요”
서울 시내 식당가에서 배달라이더들이 음식을 배달하고 있다.ⓒ뉴시스
최근 정부와 정치권에서 정책이나 아이디어를 내놨다가 비판 여론이 커지자 다시 거둬들이거나 수정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정부는 최근 고시원 방 안에 욕조를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재검토에 들어갔다.
앞서 정치권에서는 폐기되는 버스를 개조해 청년들의 단기 주거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가 청년 주거난을 임시방편으로 접근한다는 비판 끝에 철회되기도 했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혼란은 이보다 무겁다. 법 개정 당시부터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 등을 두고 개념이 모호해 산업 현장에서 분쟁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법 시행 이후 우려는 현실의 쟁점이 됐다. 노조가 기업의 투자와 경영상 결정까지 교섭 대상으로 요구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고, 결국 이재명 대통령은 노동쟁의의 구체적인 범위를 명확히 할 수 있도록 시행령 보완을 거듭 주문했다.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견될 수 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수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사례들을 보면 충분한 숙의와 부작용에 대한 검토 없이 정책을 먼저 내놓고, 논란이 커진 뒤에야 보완하거나 거둬들이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국민과 기업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책일수록 ‘일단 추진하고 문제가 생기면 고친다’는 방식은 위험할 수 밖에 없다.
정책은 발표되는 순간부터 이해관계자들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뒤늦게 정책을 수정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과 비용까지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속도전으로 추진 중인 ‘일하는 사람 기본법’과 근로자추정제 역시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플랫폼 종사자와 특수고용직 등 기존 노동법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 기본법 제정과 근로자추정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근로자추정제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노무 제공자를 우선 근로자로 추정하고 사업자가 근로자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노동 사각지대를 줄이고 새로운 노동 형태에 맞는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문제는 제도가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다.
배달업계만 보더라도 풀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플랫폼 기업과 지역 배달대행사, 음식점주, 라이더 등 여러 주체가 하나의 배달 과정에 얽혀 있어 누가 실질적인 사용자인지를 가리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근로자추정제 도입으로 근로자가 아니라는 점을 사업자가 직접 입증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다.
별도의 법무·노무 조직을 갖춘 대기업과 달리 플랫폼 입점 업체 등 영세 사업자에게는 이 자체가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근로자로 인정되는 범위가 확대되면 4대 보험과 퇴직금, 각종 수당 등 추가적인 비용도 발생할 수 있다.
플랫폼이 늘어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수수료나 배달비를 조정하거나 프로모션을 축소할 경우 그 부담은 소상공인과 소비자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플랫폼 노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자율성이다.
원하는 시간에 앱을 켜고 끄거나 여러 플랫폼을 이용하며 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전업뿐 아니라 부업이나 단시간 노동을 위해 플랫폼을 선택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근로자성이 폭넓게 인정돼 플랫폼의 비용과 사용자 책임이 커진다면 기업은 등록 인원을 줄이거나 근무시간과 업무 수행 방식을 보다 엄격하게 관리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있다.
보호를 강화하려던 정책이 결과적으로 일자리를 줄이거나 플랫폼 노동의 장점인 자율성을 떨어뜨리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정부는 일하는 사람 기본법과 근로자추정제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필요한 제도라면 추진해야 한다. 다만 ‘필요하다’는 것과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적용 대상은 어디까지인지, 사용자는 누구인지, 비용 부담은 누가 질 것인지, 기존 계약 관계와 일자리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적지 않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업계 관계자는 “법이라는 것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다툼의 여지를 최소화하고 부작용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원칙이다.
법을 먼저 만들고 모호한 부분은 시행령이나 가이드라인으로 보완하겠다는 접근보다, 어떤 경우에 누구에게 어떤 책임이 발생하는지부터 최대한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현장에서 예상되는 부작용을 충분히 듣고 제도에 반영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정책은 실험이 아니다. 일단 도입한 뒤 문제가 생기면 고치기에는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 속도보다 숙의가, 사후 보완보다 사전 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법은 시행한 뒤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행하기 전에 명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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