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고아원[조남대의 은퇴일기(106)]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8.25 14:01  수정 2026.08.25 14:01

올림픽대로를 따라 달리다 하남 미사대로에 접어들면 높다란 나무 푯말 하나를 만나게 된다. ‘나무고아원’ 이다. 처음 그 이름을 보았을 때, 가슴 한구석에 묘한 파문이 일었다. ‘고아원’이라는 단어가 가진 쓸쓸하고 시린 느낌과 ‘나무’라는 단어가 품은 푸르고 생기 넘치는 이미지가 한데 섞여 낯설면서도 아련한 울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남 미사대로 변에 서 있는 나무고아원 푯말ⓒ


이곳은 도로가 넓어지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도시개발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갈 곳을 잃고 뿌리째 뽑히거나 상처 입은 수목들을 모아 가꾸는 쉼터다. 밑동이 꺾이고, 껍질이 벗겨지고, 뿌리가 잘려나간 채 사선을 넘나들던 나무들이 실려 온다. 인간의 편리와 탐욕을 위해 파헤쳐진 땅에서 쓸모없다고 버려진 생명이다.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콘크리트 더미 아래 묻히거나 소각장의 불꽃으로 사라졌을 터다. 그러나 이곳의 비옥한 흙과 정원사의 세심한 손길은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훼손된 가지를 조심스레 잘라내고 약을 바른 뒤, 거센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든든한 버팀목을 세워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무 스스로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는 일이다.


도로확장이나 아파트 공사로 뽑히거나 상처 입은 나무ⓒ

세월이 흐른 뒤 반가운 변화가 찾아온다. 찍기고 잘리고 벗겨진 틈새로 고운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는 것이다. 아린 흔적마다 옹이가 단단하게 박혀 나무는 이전보다 더 깊고 튼튼해진다. 기력을 회복한 나무들은 다시 도심의 가로수로, 또는 시민들의 쉼터가 되는 공원으로 이식되어 제2의 삶을 시작한다. 회색빛 도시에 푸른 숨결을 불어넣는 ‘도시 숲’의 진정한 주역이자 재목 材木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미사리의 흐르는 강물 따라 서 있는 고아원의 상처 입은 나무들이 찬란한 초록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기력을 회복한 나무가 가로수나 공원으로 이식되어 숲을 이룬 모습ⓒ

나무들의 쉼터를 거니는 발걸음은 어느새 반세기도 더 지난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나를 이끌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곳곳에는 고아원이 많았다. 한국전쟁의 포화가 쓸고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가족을 잃어 세상의 온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 넘쳐나던 막막한 시대였다.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에서도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이웃 동네에 고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줄지어 신작로를 걸어서 학교를 오갔다. 우리 반에도 그곳에서 다니던 동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종종 때가 타거나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소풍날이면 우리는 정성스러운 엄마표 김밥이었건만, 그들은 누런 양은 도시락에 보리밥과 김치 몇 조각을 들고 오곤 했다. 한껏 즐거워야 할 시간이었건만 동무들의 눈빛에 서린 외로움과 그늘은 어린 내 가슴을 까닭 모를 아픔으로 아릿하게 했다.



60∼70년대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

세월이 흘러 사회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거리에는 높은 빌딩이 들어섰지만, 풍요의 그늘 뒤에는 여전히 보호자 없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오늘날의 시골 초등학교들은 심각한 저출산과 인구 소멸로 인해 학생 수가 줄어들어 하루가 다르게 폐교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모교 역시 진작에 사라졌을 법한 작은 시골 학교다. 하지만 들려온 고향 소식은 깊고 묵직함을 안겨주었다. 교정은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름 아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동 양육시설(옛 고아원) 덕분이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매일 아침 고개를 넘어 학교로 등교하는 덕분에, 학교는 폐교 기준 인원을 간당간당하게 넘기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부모의 따뜻한 품을 잃어 생채기를 안은 아이들이 학교를 지켜내는 가장 소중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삶의 풍파를 견뎌내는 모습은, 나무고아원의 나무들이 좁은 공간에서도 함께 뿌리를 내린 채 거센 바람을 버텨내는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요즈음 시골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

사람의 일생에서 아픔은 비단 아동기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꺾이거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깊은 수렁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형의 집행을 마치고 갱생보호시설을 거쳐 사회로 돌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무고아원의 풍경이 떠오른다. 차가운 담장 안에서 죗값을 치르고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따뜻한 환영이 아니라 서늘한 낙인과 보이지 않는 벽이다. 한 번 껍질이 벗겨지고 가지가 부러진 나무를 향해 쓸모없는 목재라며 외면하는 시선과 무엇이 다를까. 낙인찍힌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비난이나 방치가 아니다. 거친 풍파에 다시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줄 단단한 지지대가 아닐까.



형 집행 종료자들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필요ⓒ


상처 입은 나무에 거름과 물을 주듯 출소자와 위기 청소년에게 직업 기술을 가르치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자립을 돕는 일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투자다. 최소한의 기반이 마련될 때 그들은 범죄의 늪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사회가 더욱 안전하고 울창한 숲이 되기 위해 감당해야 할 공동의 책임이다. 나무고아원으로 옮겨진 상처 입은 나무가 정성 어린 돌봄을 통해 공원의 푸른 나무나 훌륭한 재목으로 자라나듯,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삶의 무게를 일찍 짊어진 사람들 또한 제도적 품 안에서 공동체를 떠받치는 소중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직업 기술과 정성 어린 돌봄을 통해 인재로 성장토록 유도ⓒ


우리가 감탄하는 아름다운 숲은 결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처럼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럽고 곧게 뻗은 나무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세찬 태풍에 가지가 꺾였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거나,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며 껍질이 갈라지고 터진 나무들도 있다. 그렇게 상처 품은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을 때 숲은 깊고 웅장한 생명력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완벽하고 강인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사회는 차갑고 삭막하기 십상이다. 건전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란 삶의 여정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진 이들이 언제든 찾아와 숨을 고를 수 있는 비옥한 ‘흙’이 되어주는 사회가 아닐까.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조남대의 은퇴일기'를 네이버에서 지금 바로 구독해보세요!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