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넘은 마흔팬들, 손수 그린 티셔츠 입고 손수 그린 플래카드
팬이 스스로 경험하는 일은 오래된 보편의 본능
며칠 전 지인의 초청으로 클릭비의 완전체 콘서트를 보고 왔습니다. 데뷔 27년, 모든 멤버가 온전히 함께 선 무대로는 11년 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를 오래 붙든 건 무대가 아니라 객석이었어요. 마흔을 넘긴 팬들이 그 시절처럼 직접 만든 티셔츠에 좋아하는 멤버의 이름을 새겨 입고, 손수 그린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이번 컴백에 맞춰 새로 나온 공식 응원봉이 함께 들려 있었죠. 한편에서는 명찰을 단 팬클럽 '짱'과 '부짱'이 분주히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고요. 한 객석 안에 팬덤의 여러 시대가 겹쳐 있었습니다.
'응답하라 1997'ⓒtvN
제가 팬이던 시절(참고로 저는 H.O.T. 팬클럽 'Club H.O.T.' 회원이었습니다), 기획사가 팬에게 쥐여주는 건 많지 않았습니다. 상징색 풍선과 팬클럽 우비 정도였죠. 지금 같은 포토카드도, 흔한 팬사인회도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모든 걸 스스로 만들었어요. 직접 찍은 사진을 나눠 팔고, 티셔츠를 제작해 친구와 맞춰 입고, 굿즈를 손수 만들어 나누고, 팬들끼리 크고 작은 이벤트를 꾸렸습니다. 누가 준 것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나누며 팬덤이라는 세계를 함께 써 내려갔습니다. 한국 아이돌 산업의 외연은 노래와 가수에서 끝나지 않고, 팬덤과 그들이 파생시킨 문화까지 끌어안고 있기에, 그 역사는 곧 팬덤이 스스로 만들어 온 문화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스스로 만들고 나누는' 정서가 우리만의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그레이트풀 데드 팬들은 공연을 직접 테이프로 떠 돌려 들었고, 공연장 주차장에서 손수 만든 티셔츠와 음식을 나눴습니다. 팬이 스스로 경험을 짓는 일은 오래된 보편의 본능이지요.
다만 우리가 남달랐던 건, 팬이 발명한 것을 산업이 흡수해 하나의 시스템으로 바꿔 왔다는 점입니다. 색이 겹쳐 다투던 풍선은 고유한 디자인의 응원봉이 되었고, 이제는 유사성을 두고 법정까지 가는 지식재산이 되었습니다. 손수 교환하던 직찍은 포토카드가, 팬들의 자체 이벤트는 팬사인회와 공개방송이, 정을 나누던 수제 굿즈는 업계 수익의 한 축인 공식 상품이 되었습니다. 팬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스밍 총공과 앨범 공동구매로 차트를 움직이고, 때로는 잘못된 결정을 되돌리라며 기획사를 압박하기도 합니다. 관객이 그저 지켜보는 소비자가 아니라, 아이돌과 함께 성공을 향해 뛰는 '공동 프로젝트의 주체'가 되는 구조. 그것이 한국 팬덤의 가장 뚜렷한 특수성입니다.
ⓒ저자 촬영
이런 팬덤의 모습은 세대를 거듭하며 완연히 달라졌습니다. 제 시절의 소통은 사실상 일방향이었어요. 기획사의 공지가 위에서 내려오고, 팬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렸으며, 팬이 아이돌에게 닿는 길은 팬레터나 사연, 운이 좋으면 집 앞에서의 짧은 마주침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팬카페를 대신한 위버스와 버블에서 아이돌은 팬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고, 팬은 답장을 남깁니다. 한때 팬레터로 오가던 그 마음이 이제는 월정액으로 구독하는 상품이 되었죠. '친밀함마저 구독하는 시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양방향 소통 자체가 거대한 수익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 다정한 메시지가 실은 수천 명에게 동시에 발송된다는 걸 알면서도, 팬들은 기꺼이 그 관계의 경험을 삽니다.
이 전환의 문법을 이해하면, 이번 클릭비의 성공이 왜 특별한지도 보입니다. 콘서트를 앞두고 작은 논란이 일었어요. 팬 대부분이 마흔을 넘겼는데 스탠딩 구역이 넓다는 것이었죠. '30분만 서 있어도 어지럽다', '우리 이제 다 늙었는데 좀 앉게 해달라'는 볼멘소리가 밈처럼 번지며 기사 제목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클릭비의 첫 1위곡 '백전무패'는 후렴 내내 겁내지 말고 일어서라 외치는 곡이었고, 이 절묘한 우연 앞에서 팀은 논란을 정색하고 막는 대신 팬들과 함께 웃으며 받아쳤습니다. 오래 서 있을 팬들의 종아리를 위해 부기 완화 패치까지 손수 준비해, 돌아가는 이들 손에 하나씩 쥐여 준 마무리였습니다. 마흔이 넘은 옛 스타들이 오늘의 팬덤 문법을 능청스럽게 구사한 장면에 팬들은 다시 열광했고,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퍼 날랐습니다. 기획이었다면 대단한 기획이고, 우연이었다면 대단한 센스지요. 이번 무대는 단발성 재결합이 아니라 10월 부산으로 이어지는 '지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의 객석이 제게는 더 귀했습니다. 스스로 만든 티셔츠 위에 공식 응원봉을 얹고, 명찰을 단 짱이 여전히 곁을 챙기던 그 풍경은, 팬이 만든 세계와 산업이 만든 세계가 한자리에서 손을 맞잡은 장면이었으니까요. 무대가 화려해지고 상품이 정교해질수록, 그 모든 빛의 첫 불씨가 스스로 만들고 나누던 사람들에게서 시작됐음을 기억하는 일이 더 소중해집니다. 그리고 어쩌면 K-팝의 다음 경쟁력 역시, 팬을 다시 그 무대의 주체로 불러 세우는 오래된 자리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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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Team8 Partne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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