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진청·IRRI 30년 공동 육종 결실
한류 타고 솟구친 특수미 수요…필리핀 현지 생산으로 공략
현지 B2B 호평 속 상업화 첫 발…품질 개선·도정 기술 관건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 한켠에 농촌진흥청에서 연구 중인 벼 육종이 한창이다. 농진청과 iRRI가 공동개발한 열대 적응 품종 자포니카는 필리핀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
한국 육종기술로 만든 자포니카 쌀이 필리핀 현지 생산과 상업화 시험대에 오른다. 농촌진흥청과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공동 개발한 열대 적응 자포니카는 현재까지 6품종이 필리핀에 등록됐다.
최신 품종인 ‘자포니카7’은 2021년 건기 시험에서 1ha당 7.0~8.8t을 생산해 필리핀 대표 다수확 인디카 품종인 NSIC Rc222의 6.8~8.0t과 맞먹거나 웃돌았다.
현지 농업회사는 올해 종자를 증식한 뒤 2027년 1ha 규모 실증시험을 거쳐 팡가시난과 누에바에시하, 바탕가스, 케손 등지로 재배면적을 최대 200ha까지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음식과 일본 음식점 확산으로 커지는 특수미 시장을 수입쌀 대신 현지 생산 자포니카로 공략한다는 구상이다.
품종 개발은 상업화의 첫 관문에 가깝다. 필리핀 기업 69곳을 대상으로 한 시장성 조사에서는 품질과 구매 의향이 높게 나타났으나 쌀알의 크기와 향, 도정 과정에서 생기는 쇄미가 약점으로 지적됐다.
우기 생산성과 종자 공급, 수확 후 관리까지 현지 공급망을 갖춰야 30년 넘게 이어진 공동 육종이 농가 소득과 시장 점유율로 연결될 수 있다.
"파종 45일 만에 꽃 피던 벼"…30년 묵은 '열대 조기 개화' 사슬 끊었다
한국에서 재배하던 자포니카 벼를 필리핀 논에 그대로 옮겨 심으면 수량이 급감한다. 가장 큰 장벽은 고온이나 병해충보다 일장, 즉 낮의 길이다.
온대지역의 긴 낮에 적응한 자포니카가 열대지역의 짧은 낮을 한국의 가을로 받아들이면서 파종 45일 만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줄기와 잎이 충분히 자라기 전에 이삭이 나오면서 한국에서 1ha당 7~9t이던 수량은 열대지역에서 0.6~1.4t까지 떨어진다.
농진청과 IRRI는 지난 1992년 한국·IRRI 유전자원 활용 부가가치(GUVA) 사업을 시작해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개화를 촉진하는 Hd1 유전자 대신 낮의 길이에 둔감한 비기능형 hd1 유전자를 도입하고, 열대지역의 주요 병해충에 견디는 특성을 더했다.
첫 결실은 2008년 나온 ‘말리가야 스페셜11(MS11)’이다. 단일 조건에서 출수가 늦어지는 ‘진미벼’와 열대 병해충 저항성을 지닌 ‘철원46’을 교배했다. 2009년에는 생산성을 높인 ‘자포니카1’을 육성했다. 필리핀 국립종자산업위원회는 2010년 두 품종의 대규모 재배를 승인했다.
이후 ‘자포니카2’와 ‘자포니카6’, 고지대 특화 품종 ‘코르디예라4’, ‘자포니카7’이 차례로 개발됐다. 6품종의 성숙일수는 109~145일, 도정수율은 63.0~73.0%로 조사됐다. 초기 품종이 열대 적응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였다면 자포니카7은 현지 주력 인디카와 수량을 겨루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IRRI도 2021년 GUVA 사업을 평가하며 6품종이 열대지역에서 수량 안정성을 높이고 자포니카 재배지역을 넓혔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우기 수량과 병해충·재해 저항성, 수발아와 쇄미를 포함한 품질 개선을 후속 과제로 제시했다. 시험포의 수량이 농가 소득으로 이어지려면 건기와 우기를 오가는 반복 재배와 지역별 검증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다.
필리핀 로스바뇨스 iRRI에서는 농진청의 다양한 벼 육종 실험을 하고 있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
"수입산보다 낫다" 91% 호평…B2B 맞춤 공급으로 여는 'K-쌀 밸류체인'
시장 반응은 품종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2023년 한국국제농업개발학회지에 실린 ‘필리핀 시장에서 현지 적응 자포니카 품종의 수용성’ 연구는 필리핀 B2B 업체 69곳을 대상으로 자포니카2의 시장성을 조사했다.
농진청 자료에 따르면 조사 업체의 91.3%는 자포니카2의 품질이 기존 수입산과 대등하거나 더 낫다고 평가했다. 유통업자의 94.2%가 구매 의향을 밝혔고, 수입산보다 20% 낮은 가격이 시장 진입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혔다.
자포니카가 일반 가정용 쌀보다 스시와 한식 등 특정 조리 품질을 요구하는 외식·식품업체용 특수미로 거래되는 시장 구조가 가격 프리미엄을 뒷받침했다.
상품화 과정에서 보완할 지점도 드러났다. 기존 수입산과 비교해 쌀알이 작고 둥글며 향이 약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연구진은 후속 품종인 자포니카7의 쌀알 길이를 늘려 외관을 개선했다.
깨진 쌀이 많다는 지적은 품종 특성과 함께 현지 도정·가공 과정의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자포니카에 맞는 수확 시기와 건조 조건, 도정 압력 등을 별도로 설계해야 상품 등급을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장 시험은 상업 재배로 옮겨가고 있다. 라구나 지역 농민단체가 MS11과 자포니카6·7을 1ha에 시험 재배해 판매하고, 생산 확대를 위해 한국산 수확기를 도입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다른 현지 농업회사는 2026년 종자를 늘리고 2027년 1ha 실증을 거친 뒤 재배지를 최대 200ha로 확대할 계획이다. 계약재배 농가가 생산한 자포니카를 대형 쇼핑몰과 외식업체에 공급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민다나오에서는 세부와 보홀, 팔라완 등 휴양지 외식시장을 겨냥한 재배 수요가 제기됐다.
진민아 농촌진흥청 IRRI 국외상주연구원이 열대 기후 적응이 가능한 육종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
"관세 장벽보다 현지 안착"…종자 보급·후속 관리 없으면 상업화도 없다
필리핀에서 자포니카 생산이 늘면 한국으로 역수입될 수 있다는 국내 농가의 우려도 뒤따른다. 이에 대해 농진청은 현행 쌀 관세와 필리핀의 수급 여건을 볼 때 역수입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진민아 농촌진흥청 IRRI 국외상주연구원은 “한국은 연간 쌀 40만8700t에 5%의 저율관세를 적용하고 이를 넘는 물량에는 513% 관세를 부과한다”며 “이 가운데 38만8700t은 중국·미국·베트남·태국·호주에 국가별 쿼터로 배분되고, 나머지 2만t이 국가 제한 없이 입찰할 수 있는 글로벌 쿼터다. 필리핀산 쌀이 낮은 관세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글로벌 쿼터 입찰로 좁혀진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쌀 수급도 역수출보다 내수 공급에 무게를 싣는다. 필리핀 쌀 자급률은 2020년 85%에서 2021년 81.5%, 2022년 77%, 2023년 77.9%, 2024년 71.7%로 낮아졌다. 현지 자포니카가 필리핀의 주력 인디카 시장 전체를 대체하지는 않더라도 수입에 의존하던 특수미 수요 일부를 흡수할 여지는 있다.
상업화의 당면 과제는 역수입보다 현지 생산 안정성이다. 열대 자포니카는 우기에 수량이 떨어지고,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수확 전 이삭에 싹이 트는 수발아에 취약하다.
최근 품종의 농가 포장 성적과 종자 보급 실적도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 IRRI는 품종 개발과 별개로 종자 생산자와 농가에 종자가 원활히 퍼지지 않는 점을 재배 확대의 제약으로 짚었다.
진 연구원은 “농촌진흥청은 IRRI와의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현지 농가와 기업에 지역별 맞춤형 품종을 추천하고 우량 종자를 제공하고 있다”며 “재배법과 수확 후 관리 기술에 대한 종합적인 기술 자문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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