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와 AI를 선생님 삼아... 영화계 진입장벽 허무는 'B전공자들' [누구나, 시네마②]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7.18 13:42  수정 2026.07.18 13:42

'나만의 뾰족한 취향'으로 무장한 청춘들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의 다음 단계는 직접 만드는 것 아닐까”. 이 질문 하나에서, 영화 전공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영화제가 탄생했다.


'B전공자 영화제' 포스터 및 작품 포스터ⓒ온더플로어


◆ "왜 이야기만 해야 해? 직접 만들면 안 돼?"


대학생 영화 콘텐츠 제작 크루 온더플로어가 'B전공자 영화제'를 기획한 이유는 단순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대학생들이 모여 팟캐스트와 콘텐츠를 만들며 영화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어느 순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늘 이야기만 해야 할까, 직접 만들어보면 안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다.


온더플로어도 처음부터 영화를 만드는 단체는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비평하는 모임에서 출발했지만, 오래 이야기할수록 '창작'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운영진은 "우리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직접 만든 작품을 관객과 함께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기존 영화제는 전공자나 전문 교육을 받은 창작자의 작품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전공자가 만든 영화는 애초에 공개될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다. 운영진은 "비전공 창작자들은 영화를 만들고도 '이걸 어디에서 보여줘야 하지'라는 고민을 많이 한다"며 "그런 작품들이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했다"고 설명했다.


'B전공자'라는 이름에도 이 문제의식이 담겼다. '비전공자'와 'B급 영화'를 결합한 언어유희다. 운영진은 "'B급'이라는 표현은 흔히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우리는 오히려 기존 문법을 벗어난 자유로운 상상력과 개성을 뜻한다고 생각했다"며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엉뚱한 상상력과 펄떡이는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 출품작도 영화제의 취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국어국문학과와 중어중문학과, 식품영양학과, 물리학과, 역사학과 등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양한 전공의 창작자들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운영진은 "연출 경험이 전혀 없던 2006년생 감독이 '서부극이 너무 좋아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든 사례도 있었다"며 "기술적으로는 서툴 수 있지만 기존 영화학교에서는 쉽게 나오기 어려운 시선과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제를 준비하며 가장 오래 토론했던 작품도 있었다. 블랙코미디 범죄극 '도둑잡기: 하트 앤 다이아'다. 기존의 안전한 선택지와는 결이 다른 과감한 소재와 연출 때문에 "관객들에게 너무 낯설고 자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운영진은 "'정형화된 틀을 깨는 자유로운 시선'이라는 영화제의 출발점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이라며 상영을 결정했다.


온더플로어 김승리·'만주를 향해 뛰어라!'김찬우 감독·'도둑잡기: 하트 앤 다이아' 정호원 감독·불가살이 배진서 감독ⓒ온더플로어


결과는 예상보다 더 의미 있었다. 영화제 상영이 확정된 뒤 이 작품은 칸 넥스트 필름(Cannes Next Film) 선정 소식을 전했다. 운영진은 "다소 거칠고 낯설게 느껴질지라도 자신만의 뾰족한 색깔을 담아낸 영화는 결국 통한다는 걸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었다"며 "'투박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비전공자들의 작품을 소개하겠다'는 우리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돌아봤다.


이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는 창작 생태계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영화를 배우려면 관련 학과에 진학하거나 사설 교육기관을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유튜브와 온라인 클래스, 창작 커뮤니티를 통해 촬영과 편집을 익히고 팀을 꾸려 영화를 만드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운영진은 "영화를 만드는 일부터 알리는 일까지 창작 생태계가 다양해졌다"며 "스마트폰과 편집 프로그램이 보편화되면서 기술적인 장벽은 낮아졌고, 이제는 영화에 대한 애정과 '나만의 뾰족한 취향'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영화제를 준비하며 가장 깊게 남은 기억도 화려한 수상이 아니었다. GV에서 감독들에게 "영화를 끝까지 완성하게 한 원동력이 무엇이었느냐"고 묻자 많은 감독이 한목소리로 "함께한 팀원들"을 꼽았다는 것이다. 운영진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영화가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 끝내 한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는 사실이 이번 영화제를 준비하며 가장 큰 감동이었다"며 "앞으로도 완성도 때문에 시작조차 망설이는 비전공 창작자들이 부담 없이 자신의 첫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플랫폼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파프리카 청춘이다' 포스터ⓒ감독 제공

◆ "하면 정말 다 되더라고요"… 비전공자 세 사람이 만든 첫 번째 영화


'파프리카 청춘이다'는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이수현 감독, 섬유예술과 이효리 감독, 중어중문학과 정연우 감독이 공동 연출한 27분 2초 분량의 단편영화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세 사람은 영화 동아리에서 만나 의기투합했고, 함께 첫 작품을 완성했다.


영화는 어느 날 갑자기 파프리카가 되어버린 춘과 그런 그를 찾아온 친구 윤이 나누는 하루 동안의 대화를 따라간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채소가 됐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청춘'은 과연 무엇인가"로 현실적이다.


이수현 감독은 "'청춘'이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소비되고 있다고 느꼈다"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익숙한 문장을 뒤집어, 모두가 규정하는 청춘이 아니라 각자가 살아가는 청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감독들은 파프리카가 된 상황 자체를 특별한 사건으로 소비하기보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두 인물의 시덥지 않은 대화를 통해 '청춘'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개인의 불안과 고민, 그리고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을 담아내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를 만든 세 사람이 모두 영화 비전공자라는 사실이다. 국어국문학과와 중어중문학과, 섬유예술과라는 서로 다른 전공을 공부하던 이들은 문학과 미술, 인문학적 감수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에 녹여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우선 제작비라는 현실적인 장벽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정연우 감독은 "생각했던 것보다 비용이 꽤 많이 들었다"며 특히 장비 대여에 많은 돈이 들어 힘들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카메라를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한 상태로 메인 촬영에 들어가야 했던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수현 감독 역시 "감독들을 포함해 모든 스태프가 비전공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고 돌아봤다. 제작비가 적다 보니 촬영에 쓸 수 있는 시간도 자연히 줄었고, 한정된 여건 속에서 매번 최선의 선택을 고민해야 했다. 체계적으로 배운 적 없는 프리 프로덕션부터 후반 작업인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이들이 기댄 것은 동아리 선배와 유튜브 강의, 그리고 생성형 AI 도구인 챗GPT였다. 이 감독은 이들을 "선생님 삼아서 겨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많은 제약 속에서도 이들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현장의 호흡과 동료들이었다. 이수현 감독은 더운 여름날 촬영 현장에서 "레디, 액션"을 외치는 것을 순간 깜빡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땀이 속절없이 흐르는 더위 속에서도 모두가 숨죽여 집중하던 5초 남짓의 정적 속에서 영화라는 공동 작업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이때 느낀 선명한 감각이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고 밝혔다.


정연우 감독에게는 함께 땀 흘리는 동료들이 버팀목이 됐다. 정 감독은 "수현 씨와 효리 씨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빛나는 모습을 볼 때 마음속 열정도 다시 타올랐다"며 "그렇게 다시 제작에 몰두하다 보면 제가 영화를 왜 하고 싶어 했고 왜 사랑하게 됐는지 떠올라 계속 만들 힘이 생겼다"고 전했다.


사실 세 사람이 처음부터 영화 연출을 꿈꿨던 것은 아니다. 영화의 문을 두드리게 한 계기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느낀 강렬한 감정이었다. 이수현 감독은 스무 살 겨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고 처음으로 '배 아프다'는 질투 섞인 감정을 느꼈다. 이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이 워낙 많다 보니, 말이나 글 외의 다른 소통 방법으로서 영화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고 설명했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미술감독을 꿈꿨던 이효리 감독은 "어두운 공간에 앉아 큰 화면으로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상황에 하나 된 듯 몰입하는 느낌이 좋았다"며 "아름답게 세팅된 공간이나 소품을 보면 '내가 저걸 만들었어야 하는데' 하는 질투심이 생겨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고 말했다.


정연우 감독은 고등학생 때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본 뒤 영화에 매료되었다. 정 감독은 "정신없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제 마음 안에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며 대학생이 되자마자 고민 없이 학교 중앙동아리 '영화패 누에'에 입부 신청서를 냈다고 전했다.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지금, 세 사람에게 영화가 갖는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이수현 감독은 "영화에 대한 미련을 없애려고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애정이 더 커져서 큰일 난 경우"라며 웃어 보였다. 이어 이 감독은 "지금 저에게 영화는 굉장히 돈이 많이 드는 취미이자, 말이나 글과 같은 저의 떠들기 방법 중 하나"라고 정의했다.


이효리 감독에게는 오랜 꿈을 펼쳐본 무대였다. 이 감독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다양한 경험 중에 첫 번째 꿈이었던 영화미술감독을 실현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며 "새로운 도전이자 저의 창작 활동의 반경을 넓혀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정연우 감독은 영화를 "영원히 미화된 상태로 기억될 창작 활동"이라고 표현하며, "돌이켜 봤을 때 제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고,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게 해주는 활동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수현 감독은 올해 8월 제작 지원을 받은 신작 촬영을 앞두고 있으며 "언젠가는 말 없는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이효리 감독은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가슴 한편에 존재한다"며 또 다른 꿈을 향한 도전을 예고했고, 정연우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톤의, 비관적이기보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망설이는 다른 비전공자 창작자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이수현 감독은 "비전공자로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지만, 동시에 비전공자이기에 생각보다 더 재밌고 자유로운 경험이었다"며 "영화라는 공동작업의 에너지를 한번 쯤은 느껴보셨으면 좋겠다"고 독려했다.


이효리 감독은 "처음 혼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라며 "마음 맞는 동료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영화의 시작"이라고 팁을 전했다. 정연우 감독은 "일단 도전해보시길 바란다. 직접 해보니, 하면 정말 다 됐다"라고 도전을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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