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수계의 경고…반도체에 잠식되는 농업 인프라
"평시 기준 여유량은 착시"…2022년 대가뭄 잊었나
한농연 "사전 협의 없는 일방 통행, 실효 대책 내라"
지난 2023년 3월. 전남 화순군 사평면 주암호 상류에서 주암댐 건축 이후 수몰됐던 다리가 가뭄 여파로 모습을 드러냈다. ⓒ뉴시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지난달 30일 서남권(광주·전남) 신규 반도체 산업단지 용수 공급 계획을 공개했다. 반도체 팹(Fab) 4기와 협력업체 등이 입주하면 하루 65만t의 공업용수가 필요하다는 정부 추산에 따라, 동복댐(30만t)·주암댐(5만t)·장흥댐(10만t)·보성강댐(10만t)·나주댐(10만t) 등 5개 댐을 동원하는 방안이 담겼다.
그런데 이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농업계가 들고 일어섰다. 나주댐이 전남 나주평야 9000여ha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대표적 농업용 댐이기 때문이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이하 한농연)는 다음 날인 7월 1일 성명을 내고 “농업계와 충분한 협의가 생략된 채 나주댐 용수 전용 방안이 발표됐다”며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을 강력 촉구했다.
나주평야 농업용수 33%를 삼킬 '반도체 팹'
정부 계획을 수치로 들여다보면 농업계의 우려가 왜 나오는지 가늠된다. 나주댐 연간 총 용수 공급량은 1억900만t이다. 이를 365일로 나누면 하루 평균 공급량은 약 29만8000t 수준이다. 정부가 반도체 산단에 전용하겠다는 하루 10만t은 나주댐 현재 연간 공급량의 약 33%에 해당하는 규모다.
나주댐 총 저수 용량은 9120만㎥(유효저수량 8780만㎥)로 영산강 수계 4대 농업용 저수지 중 가장 크다. 나주댐 하나가 나주평야 93.05㎢(약 2815만평)에 달하는 농경지에 물을 대고 있다.여기서 하루 10만t을 산업용으로 돌리면, 가뭄 시에는 농업용수 공급 여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단순 계산이 성립한다.
반도체 산업용수 배정이 나주평야 농업용수 안정성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함)
농업계와 전문가들은 “여유량 계산이 평시 기준”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지난 2022년 호남권을 강타한 50년 만의 최대 가뭄과 같은 재해가 닥쳤을 때 댐 여유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산업용 배정 물량을 농업용으로 되돌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소양강댐 10분의 1로 버티는 호남…'확률'이 아닌 '예정된 충돌'
나주댐 전용 계획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는 최근 10년 이 지역의 가뭄 기록이 증명한다. 2022년 전남은 평년 강수량의 64.6%밖에 기록하지 못하며 50년 만의 극한 가뭄을 겪었다. 같은 해 10~11월 나주호 저수율은 30%대까지 추락했다.
전남 4대 농업용 저수지(나주호·장성호·담양호·광주호) 모두 저수율이 평년 대비 절반 수준 이하로 떨어지며 다음해 영농을 위한 용수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농업용 저수지가 정상 영농 기능을 유지하려면 저수율 70% 이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당시 30%대는 사실상 ‘운영 임계점’ 아래였다.
이듬해인 2023년 봄 영농기 상황도 심각했다. 영산강 수계 저수지 저수율은 58.5%로 전국 평균 72.7%를 크게 밑돌며 전국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3단계 용수 확보 비상 대책’을 가동하며 영산강 4대호에서 하천 굴착 등을 통해 1100만㎥를 긴급 확보해야 했다. 2025년에도 전남 저수지 1051곳 평균 저수율이 57% 수준에 머물며 농어촌공사가 긴급 대응 조치에 나섰다.
지난 2022년 광주·전남의 기상가뭄 발생일수는 281.3일로, 1974년 이후 최장 기록을 세웠다. 전남 나주는 335일로 화순 357일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이는 단순 무강수일수가 아니라 최근 6개월 누적강수량을 반영한 표준강수지수 기준의 기상가뭄 발생일수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함)
이 지역의 구조적 취약성은 수계 자체에 있다. 한강 수계에는 소양강댐(유효저수용량 29억t), 낙동강 수계에는 안동댐이 있다. 그러나 영산강 수계에는 다목적 대형 댐이 없다.
나주호·장성호·담양호·광주호 등 4개 농업용 저수지의 유효저수용량을 합해도 약 3억600만t으로 소양강댐 한 개의 10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이 제한적 수자원에서 하루 65만t이라는 막대한 산업용수를 상시 조달해야 한다면, 가뭄 시 농업용수와의 충돌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학술 연구도 나주호의 가뭄 취약성을 지적했다. 한국방재학회는 2009~2018년 나주호 공급량과 저수율 자료를 바탕으로 물수지를 분석했다.
연구에서 나주호 수혜구역은 9267㏊로 설정됐다. 분석 기간 당해년도 5월 10일부터 9월 21일까지를 영농기간으로 잡았다. 나주호 유역의 영농기 강수량은 2015년 541㎜, 2016년 703㎜, 2017년 538㎜로 나타났다. 표준강수지수(SPI)는 각각 -1.93, -1.15, -1.94로 조사됐다. 연구진은 SPI가 -1 이하인 2015~2017년을 가뭄년도로 분류했다.
같은 연구에서 2015~2018년 나주호 수혜구역의 필요수량은 크게 늘었다. 연도별 필요수량은 2015년 4886만5000㎥, 2016년 5512만8000㎥, 2017년 4653만2000㎥, 2018년 5241만7000㎥였다. 연구진은 2016~2018년 실제 공급량이 필요수량보다 적어 농업용수가 부족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2018년 관측 부족량 1390만t은 관리 저수율 시나리오에 따라 580만t까지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나주호가 평년 평균 공급 가능량보다 가뭄년 최저관리 저수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농업용수 부족 폭이 달라지는 수원이라는 뜻이다.
축산분뇨 탓하더니 이제는 물까지…깊어지는 기후부-농가 불신
한농연은 7월 1일 성명에서 이번 나주댐 전용 방안의 핵심 문제를 ‘사전 협의 생략’으로 규정했다.정부가 반도체 산단 조성 계획을 발표한 이후 농업계에서 농업용수 부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는데, 구체적 수원(水源) 확보 계획을 발표하면서도 직접 이해당사자인 농업인들과 어떤 협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기후부와 농업계의 첫 충돌도 아니다. 지난 4월 김성환 기후부 장관은 소양호 붕어 집단 폐사의 원인으로 축산농가의 가축분뇨와 경종농가의 농약 사용을 거론했다.
명확한 근거 없이 농가를 수질오염 원인으로 지목한 것에 농업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두 차례의 충돌을 경험한 한농연은 “기후부의 농업 인식 부족이 구조적”이라며 “신재생에너지·탄소 감축·수자원 관리 등 앞으로의 핵심 과제 추진 과정에서도 갈등이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임에도 매년 가뭄을 걱정해야 하는 지역이 바로 호남권이다. 농민단체가 농업용수 안정 확보와 협의 체계 마련을 요구하는 데 대해 정부도 구체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함)
전국농민회총연맹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반도체 산단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초고압 송전탑 건설 경과지의 주요 희생 지역이 농지라는 것이다. 전력(송전탑)과 용수(나주댐), 두 인프라 축 모두에서 반도체 산업이 농업 인프라를 잠식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한농연은 이날 성명에서 ▲농정 당국 및 농민단체와 긴밀한 협의 체계 구축 ▲주요 정책 수립·추진 시 농업계와 적극 소통 ▲농업용수 안정 확보를 통한 농업인 생존권 보장을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 신속 제시 등을 기후부에 요구했다.
이에 대해 기후부는 여전히 하루 65만t 공급을 자신하고 있다. 기후부는 “7개 댐의 총저수 용량 15억t, 하루 공급 가능량 337만t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평시 기준이다. 2022년처럼 저수율이 30%대로 급락하는 극한 가뭄 상황에서 산업용으로 배정된 하루 10만t을 농업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나 우선순위 기준은 현재 계획 어디에도 명시돼 있지 않다.
반도체 산업단지 입지 발표 이후 불과 사흘 만에 용수 공급 계획을 내놓은 속도전 앞에서, 농업인들이 요구하는 협의 테이블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한농연 관계자는 “기후부가 농업·농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농정 당국을 비롯한 농민단체 등과 긴밀한 협의 체계를 구축하고, 주요 정책 수립과 추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소통할 것을 요구한다”며 “아울러 농업용수의 안정적인 확보를 통해 농업인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신속히 제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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