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 '레모네이드', '쇠맛'에 띄운 러블리 매력 [MV 리플레이 ㊵]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06.10 15:51  수정 2026.06.10 15:51

'레몬 버그'가 만든 평행세계의 오작동,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에스파의 챕터3

쇼츠, 릴스 등 짧은 길이의 영상물들만 소비되는 현재 가수가 곡 안에 담아낸 상징과 그들의 세계관, 서사를 곱씹어 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아티스트가 담아낸 '작은 영화'인 뮤직비디오를 충분히 음미해보려 합니다. 뮤직비디오 속 이야기의 연출, 상징과 메시지를 논하는 이 코너를 통해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고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재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그룹 에스파(aespa)가 신곡 '레모네이드'(LEMONDAE) 뮤직비디오를 통해 한층 확장된 세계관의 세 번째 챕터를 열었다. 이번 뮤직비디오는 에스파의 평행 세계에 불시착한 '레몬 버그'로 인해 차원에 균열이 생기고, 싱크(SYNK)를 이어주던 통로인 포스(P.O.S)가 오작동하면서 벌어지는 기묘한 현상을 다뤘다. 다중우주의 붕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에스파는 도망치거나 패닉에 빠지는 대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디스토피아를 탈바꿈시키며 주체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에스파 '레모네이드' 뮤직비디오
줄거리


영상은 90년대풍의 빈티지한 카페에서 레몬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가며 시작된다. 가게 안에서 독특한 안경을 쓴 채 화면을 주시하는 닝닝을 지나, 검은 제복을 입은 윈터가 하얗고 삭막한 공간을 걸어간다. 평화롭던 카페 내부의 시간은 기묘하게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카리나는 아이(ae) 카리나에게 딱밤을 맞기도 한다. 이에 지젤은 자신의 레모네이드를 미련 없이 바닥에 버린다.


'레몬 버그'로 인한 균열이 심화되자 낙하하던 물방울이 공중에서 멈추고, 윈터는 같은 장소에서 시차를 두고 다른 포즈를 취하는 차원 왜곡을 겪는다. 쏟아진 레모네이드가 다시 컵으로 흘러 들어오는 등 엔트로피가 역전되는 현상 속에서, 지젤은 굳어있는 마네킹을 과감하게 깨부수며 디스토피아의 규칙을 거부한다. 점차 세포처럼 퍼져나가는 균열 끝에, 에스파는 거대한 레모네이드 형상 안에서 당당하게 군무를 펼친다. 사방이 쇠로 변하며 세계가 통째로 파괴되려는 순간, '웨잇, 홀드 업, 스톱'(Wait, Hold up, Stop)이라는 가사와 함께 무너져 내리던 다중우주가 그대로 정지하며 뮤직비디오는 막을 내린다.


해석


이번 뮤직비디오는 에스파가 광야(KWANGYA)와 리얼 월드, 다중우주를 격렬하게 오가며 발생한 '차원의 피로 누적'을 시각화했다. 차원을 연결하던 포스의 균열은 일반적인 인간에게는 패닉을 부르지만, 이미 블랙맘바를 처단하고 나비스(nævis)와 교감해 온 에스파에게는 별일 아닌 해프닝에 불과하다. 이들은 위기를 즐거운 놀이로 치환한다.


여기서 '레몬'은 완벽했던 가상 세계 시스템에 치명적인 에러를 일으킨 오류이자 시고 떫은 '인생의 위기'를 상징하는 중의적 오브제다. '인생이 네게 레몬을 준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서양 속담처럼, 에스파는 차원의 균열이라는 재앙을 달콤한 '레모네이드'에 비유했다.


'넥스트 레벨'(Next Level)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라. 광야의 것을 탐내지 마라'는 가사처럼 절대적인 규칙들은 챕터 3에 이르러 완전히 깨진다. 시간이 되돌아가고 시스템의 아이를 깨부수는 지젤의 모습은 규격화된 세계관의 통제를 벗어난 에스파의 완전한 자율성을 뜻한다. 마지막에 세상을 멈춰 세우는 엔딩은, 붕괴하는 다중우주의 주도권이 시스템이 아닌 에스파에게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에스파 '레모네이드' 뮤직비디오
총평


에스파의 '레모네이드'는 자신들이 쌓아 올린 방대한 세계관의 아카이브를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반복해낸 작품이다. 디스토피아적인 사운드 텍스처와 대비되는 청량하면서도 묵직한 보컬 전개는 '쇠맛'과 '단맛'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준다.


비트에 완벽하게 맞물리는 칼각 군무는 뮤직비디오의 서사와 적절히 섞여 시각적 흥을 한껏 돋운다. 특히 검은 제복을 입고 펼치는 군무 씬은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를 에스파식 쇠맛으로 재해석해, 글로벌 팬들 사이에서 이미 '유언을 말해봐'라는 독특한 밈을 파생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귀엽고 상큼한 콘셉트를 시도해도, 혹은 전형적인 제복 스타일을 소화해도 타 아티스트의 잔상이 겹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에스파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어떤 장르의 옷을 입혀놔도 결국 자신들만의 느낌을 거쳐 고유의 브랜드로 만드는 이들의 스펙트럼은 에스파가 왜 케이팝(K-POP) 씬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확고히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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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마저 팝하게 즐기는 에스파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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