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가짜 자아를 파괴하다, 5년 차 케플러의 대범한 '자아 각성'
쇼츠, 릴스 등 짧은 길이의 영상물들만 소비되는 현재 가수가 곡 안에 담아낸 상징과 그들의 세계관, 서사를 곱씹어 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아티스트가 담아낸 '작은 영화'인 뮤직비디오를 충분히 음미해보려 합니다. 뮤직비디오 속 이야기의 연출, 상징과 메시지를 논하는 이 코너를 통해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고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재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걸그룹 케플러(Kep1er)가 3월 31일 여덟 번째 미니 앨범 '크랙 코드'(CRACK CODE)를 발매하고 타이틀곡 '킬라'(KILLA)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데뷔 이래 가장 파격적인 '블랙 여전사'로 변신한 케플러는 관성처럼 흘러가던 과거의 한계를 깨부수고 숨겨진 본성을 마주하는 순간을 그렸다.
'킬라' 뮤직비디오 ⓒ웨이크원
줄거리
뮤직비디오는 내면의 균열을 예고하듯 멤버 다연이 손을 대자 거울이 산산조각 나는 강렬한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일상 속에 갇혀 있던 멤버들은 본능적인 자아를 형상화한 미스터리한 사각형 '큐브'를 발견하고 호기심을 보인다.
안주하려는 관성과 변신을 가로막는 제약을 깨부수듯, 멤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바닥과 벽을 부수며 전진한다. 마침내 억눌린 자아의 결정체인 큐브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데 성공한 케플러는, 내면 깊숙이 숨겨두었던 진짜 자아와 마주한다. 영상 후반부, 완전히 각성한 6인의 멤버들이 칼각 군무와 함께 왼손 검지를 입에 갖다 대는 킬링 포즈를 취하고, 화면 가득 하트가 아닌 조준경의 불빛이 비치며 웅장하게 막을 내린다.
해석
'킬라'는 타인을 겨냥하는 살인자가 아닌, 내면의 유약함과 과거의 한계를 처단하는 내면의 저격수를 뜻한다. 오프닝의 거울은 타인의 시선에 맞춰 가공되었던 '보여지는 나'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멤버들이 파괴하는 벽과 바닥, 그리고 최종 오브제인 '큐브'는 서바이벌 출신 그룹으로서 늘 따라붙던 시스템의 한계와 정형화된 틀을 상징하는 방어기제다.
가사 중 '내가 만든 시나리오'나 '불안할 필욘 없어, 어둠 속에서 피워내는 bright light'라는 구절은 이러한 자아 각성의 서사를 뒷받침한다. 상대방이 도망치기도 전에 먼저 쫓아가겠다는 '고 런 비포 아이 캐치 야'(Go run before I catch ya)라는 경고는 이제 더 이상 수동적으로 사랑을 기다리거나 위로를 구하지 않겠다는 대범한 선언이다. 검지를 입에 대는 킬링 안무는 비밀스러운 각성의 신호이자, 확신에 찬 침묵의 통제력이다. 이렇듯 내면의 파편을 딛고 일어나 스스로를 '원석'으로 재각인하는 과정을 뮤직비디오를 통해 시각화했다.
'킬라' 뮤직비디오 ⓒ웨이크원
총평
2022년 데뷔곡 '와다다'(WA DA DA)의 에너지를 기억하는 리스너들에게 이번 '킬라'는 음악적 변주를 넘어 정체성 확립의 곡으로 다가온다. 작년 '버블 검'(BUBBLE GUM)을 통해 파격적인 변신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면, 이번 미니 8집은 5년 차 커리어를 관통하는 확신을 남긴다. 아웃트로의 브레이크 구성을 꽉 채운 칼각 군무는 '퍼포먼스 맛집'이라는 타이틀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기존의 팝하고 친숙한 멜로디를 덜어내고 일렉트로닉 힙합을 내세워 대범함을 강조했다. 칠(Chill)하고 매혹적인 어둠을 입은 케플러는, 서바이벌 그룹의 유효기간이라는 편견을 보란 듯이 깨부수었다. 그 균열(CRACK) 사이로 스스로 새로운 코드를 입력한 이들의 서사는, 케이팝 씬에서 주체적인 파동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줄평
서바 그룹 꼬리표는 이제 안녕, '정식 그룹' 케플러의 여전사 매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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