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프로그래머 채용 조건 등 인사 개혁과 정부의 전폭적 예산 증액 필요성 역설
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의 'A-리스트' 공식 승인에 이어, 아시아 영화제 최초로 최고상 수상작의 아카데미 시상식 직행 자격을 획득한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진정한 글로벌 플랫폼으로의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1996년 영화제 출범 당시 부위원장으로서 기틀을 다진 뒤, 2024년 이사장으로 복귀해 올해로 취임 3년 차를 맞이한 박광수 이사장은 한국 영화사를 바꾼 거장 감독 출신의 사령탑이다. 데뷔작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하며 '코리안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그는, 이제 영화제 행정가로서 진두지휘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전 세계 단 6개 영화제에만 부여된 오스카 직행 티켓을 거머쥐며 경쟁 영화제로 완벽히 탈바꿈한 지금, 박 이사장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한다. 이번 아카데미의 규정 개정은 단순히 출품 방식의 확대를 넘어, 국가 간 경쟁의 틀을 깨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창작의 자유에 주목하겠다는 글로벌 영화계의 패러다임 변화로 풀이된다. 17일(현지시간) 프랑스 팔레 데 페스티벌 내 KOFIC 홍보관에서 만난 박광수 이사장 역시 이번 결정이 지닌 문화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며칠 전에 아카데미 대표와 부대표 등 헤드 3명을 만났습니다. 내가 '부산에 대해 잘 아나, 어떻게 우리를 뽑았지?' 하고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카데미 내부에 그런 것을 선정하는 위원회가 따로 있어서 장기간 리서치와 내부 회의를 거쳤다고 하더군요. 전 세계에서 6개 영화제를 선정하는 게 쉽지 않은데 그 과정을 거쳐서 결정이 된 겁니다. 한국이 문화적으로 많이 커졌다는 이야기를 그들도 하더라고요. 그게 선정 배경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한국 작품을 아카데미에 보낼 때 영진위에서 뽑아서 보냈고, 뉴욕이나 LA에서 형식적으로 개봉하곤 했습니다.하지만 이번에 우리 경쟁 부문 대상(부산 어워드 대상)을 받으면 아카데미로 갈 수 있게 길을 열어준 것은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이란 영화 사례처럼 국가에서 생각이 달라 자국 대표로 출품이 안 되는 영화들도 있는데, 이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제에서 평가받은 영화들을 포함시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다고 봅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비경쟁에서 경쟁 영화제로 체질 개선을 단행한 지 불과 1년 만에, 최고상 수상작이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직행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지난해 본격적으로 경쟁 부문을 도입했는데, 바로 다음 해에 아카데미 출품이 가능한 공식 영화제로 지정되는 성과를 거두며 좋은 작품을 가져와 소개하기 훨씬 유리해졌습니다."
박광수 이사장은 부국제가 아시아 영화를 세계 무대에 소개해 온 고유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도, 과거의 영광과 방식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특히 30년간 영화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뉴커런츠 섹션을 전면 개편하고 본격적인 경쟁 체제를 도입하게 된 과감한 결단 배경을 털어놓았다.
"아시아 영화의 위상이나 부산국제영화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걸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유지에 머물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발전시켜야죠. 30년 전에 만들었던 포맷을 그대로 가져가면 안 됩니다. 시대가 바뀌면 영화제도 현실에 맞게 계속 변해야 합니다. 뉴커런츠를 30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운영해왔는데 시대 변화에 맞춰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 영화를 정말 포커스하려면 오히려 경쟁 체제로 가야 더 주목받고 더 살아난다고 봤어요. 경쟁이 돼야 요즘 시대에 기사도 좀 더 나오고 재미도 있잖아요. 감독만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배우도 다 같이 하는 건데, 경쟁 부문으로 바꾸면서 배우상도 주고 상금도 주면서 영화제 전체의 활력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작년에 경쟁 체제로 바꾸고 나서 작품 유치나 화제성 면에서 훨씬 유리해졌고, 영화제가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글로벌 무대에서 굵직한 성과를 내며 외연을 확장하고 있지만, 정작 내부 조직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의 틀에 갇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광수 이사장은 부국제가 진정한 글로벌 표준으로 도약하기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내부 과제와 인사 제도 개역에 대해 뼈아픈 진단을 내놓았다.
"글로벌 영화제로 방향을 잡아가는 과정에 있는데, 국제적인 네트워크는 우리가 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부 역량이 그걸 다 받아줄 수 있느냐인데, 내가 볼 때는 아직도 굉장히 미숙합니다. 시스템을 정비해야 해요. 지금 프로그래머들을 뽑을 때 부산 거주를 조건으로 상근직으로 묶어두는데, 이건 좀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를린 영화제만 해도 집행위원장이 영국 사람, 미국인이고 영국에 살면서 독일어를 전혀 못 해도 일합니다. 이런 조건으로는 인재를 뽑기 한계가 있어요. 이런 내부 정비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하나씩 해나가는 중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가 거둔 수많은 성취의 중심에는 언제나 스크린을 뜨겁게 채운 관객들이 있었다. 박광수 이사장은 부국제가 세계적인 영화인들에게 찬사를 받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단연 ‘관객들의 힘’을 꼽으면서도, 지속 가능한 영화제 운영을 위해 독특한 관객 소비 패턴을 정밀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현장 전문가로서의 과제도 함께 전했다.
"아시아 최고 영화제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내가 볼 때는 영화제 운영진이 잘해서가 아니라 관객들이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외국 감독들이 부산에 와보고는 '관객들이 너무 훌륭하다, 미국 가면 소문내겠다'며 사진을 찍어 갑니다. 부산 관객 데이터를 내보면 20~30대 여성이 70~80%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부산 지역 사람은 20%밖에 안 되고 80%가 외지 사람인데, 서울·경기가 제일 많습니다. 아쉬운 점은 주말 포함 휴가 내서 내려와 며칠 동안 한 사람이 7~8편씩 무제한으로 영화를 보고 일요일 밤에 다 올라가 버립니다. 그래서 주 초가 되면 손님이 뚝 떨어지는 성향이 있는데, 우리가 이런 성향을 잘 분석하면서 영화제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최근 글로벌 영상 산업 전반에 AI(인공지능) 도입이 급격화되면서 영화계 역시 이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박광수 이사장은 기술적 유행에 휩쓸려 영화제 안에 별도의 AI 섹션을 만드는 등의 움직임에는 선을 그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보다 창작의 본질과 영화 생태계를 지키는 것이 먼저라며 소신을 밝혔다.
"마켓에서 AI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굳이 AI 영화제를 따로 하거나 섹션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 아카데미에서도 AI로 지은 것은 상을 안 준다고 하잖아요. 과거 CG(컴퓨터 그래픽)가 처음 나왔을 때도 획기적이었지만, 그런 기술적인 것 가지고 영화가 확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유용한 부분일 뿐이지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아요. 감독들 말로는 연출부를 별로 안 써도 리서치 정보를 다 찾아주니 편하다고는 하는데, 그런 부분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봅니다."
내부 시스템 혁신을 말할 때는 엄격하고 단호했던 박광수 이사장이었지만, 프로그래머들과의 작품 선정 과정을 이야기할 때는 이내 영화 감독 출신다운 친근하고 위트 있는 면모를 드러냈다.
"영화 선정에 있어 구체적인 셀렉션에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다만 프로그래머들에게 너무 재미없는 영화만 골라서 관객들 잠자게 하지 말고, 좀 더 관심을 가질 만한 영화를 하라는 얘기는 합니다. 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겠지만요. (웃음)"
지난해 30주년을 기념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느 때보다 화려한 게스트와 초청작으로 가득했다. 올해도 이같은 화제성을 이어갈지 역시 관심사다. 올해 치러질 제31회 영화제의 규모와 작품 라인업에 대한 기대감을 묻는 질문에, 박광수 이사장은 현실적인 재정 여건의 한계를 짚으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필요성을 역설했다.
"올해 예산 여건이 다소 줄어든 면이 있지만 영화제 규모는 예년 수준으로 정성껏 꾸려나갈 생각입니다. 다만 부산국제영화제는 단순히 하나의 지역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적 문화 브랜드인 만큼, 중앙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 확대가 절실합니다. 지난 몇 년간 정부 지원 예산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다가 다행히 최근 들어 소폭 회복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영화제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국비 비중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부국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로벌 스탠다드로 스케일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이거나 미미한 수준의 지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장기적이고 전폭적인 예산 증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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