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L 전설´ 주희정…이 남자가 사는 법-하-

이준목 객원기자

입력 2009.04.07 12:27  수정

[스포츠人사이드(2)]´인간적인 전설´ 주희정

선천적 천재형 아닌 후천적 노력형 스타

주희정은 고려대에 진학했지만, 제대로 게임을 뛰어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프로에 진출했다.


■ 주희정이 걸어온 길

‘바른생활 사나이’ ‘철인’ ‘체력왕’ 같은 모범선수 이미지가 강한데.

- 일단 제가 봐도 성실해요(웃음). 한 가지에 빠지면 그거에만 몰두해요. 이걸 지금 해야 되겠다 싶으면 옆도 안보고 뒤도 안보고 그 한 가지만 쫓아요. 고집도 세고 욕심도 많고.


근성 있는 선수는 많지만 연습벌레라는 칭호를 받는 선수는 많지 않죠. 농구에 독기를 품고 빠져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 집안이죠 집안.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장으로서 집안을 일으켜야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이랑 놀지도 않고, 체육관에서 농구공 튕기면서 놀았어요. 사실 처음엔 농구가 재밌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빵과 우유준다 해서 했어요. 급식이라고 하잖아요. 그때 어린 생각으로 운동을 하면 참 많은걸 주는구나라고 생각했죠. 돌아가신 할머니는 당시에 반대를 많이 하셨죠. 힘도 들고 돈도 많이 들고. 근데 의외로 농구가 돈이 안 들어요(웃음). 공만 있으면 되니까. 할머니도 지금은 하늘에 계시면서 잘됐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내가 과연 농구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은 없었나요?

- 불안하다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생각이 더 강했어요. 아직 젊으니까. 안 되면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으면 되니까.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강했죠. 오히려 그 시간에 더욱 노력하려고 애썼죠.


어찌 보면 농구대잔치 세대인데, 고려대에 수능을 봐서 진학하고 나서 제대로 게임을 뛰어보지도 못하고 프로에 진출했어요. 아쉬움은?

- 솔직히 아쉬움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제가 그때 수능을 떨어졌으면 더 좋았었을 것 같아요. 왜냐면 그때 실업 산업은행(프로화 이전 나래 전신)에 직원으로 입단하기로 되어있었거든요. 최명룡 감독도 계셨기 때문에. 솔직히 당시 저는 학교가 목적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유망주는 아니었죠.

- 당시 저는 부족한 게 많았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웨이트를 했는데 그때 저는 3점슛을 쏘면 림에 맞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고등학교 씨름부 애들이랑 웨이트랑 같이 하면서 훈련했어요. 당시 많은 선생님들이‘전망이 없다’ 농구로 대성하기 힘들다‘라고 했어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중에 반드시 그분들이 잘못 봤다는 걸 입증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최명룡 전 나래 감독은 주희정이 ´아버님´이라고 부를 만큼, 믿고 따랐던 농구인생의 은인이었다.
새로운 농구인생을 열어준 은인이 바로 최명룡 전 나래(한양대)감독이죠?

- 고3때 최 감독님을 처음 만났죠. 지금은 이제 편안한 아버님 같아요. 감독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아버님이라고 부르는게 익숙해요. 지금은 같이 있지 않지만 항상 힘이 되는 분이죠.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사모님과 같이 밥도 먹고요.

지도 스타일은, 너무 얌전하시죠(웃음). 싫은 소리를 잘 못하세요. 마음이 여리셔서. 선수들을 야단치면 혼자 미안해서 금방 풀어주시고. 이번에 한양대로 부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걱정을 좀 많이 했죠. 전화를 드렸는데 사실 축하보다는, 정말 좋으신 분인데 힘들 때 부임하셔서 괜찮을지 걱정이 됐죠.


나래에서 당시 주전가드 이인규의 부상으로 처음 출전 기회를 잡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죠?

-아, 그게 웃긴 이야기에요. 제가 수련 선수로서 5개월이 지나고 연봉을 받는 정식선수가 됐어요. 그때는 저는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좋다.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생각만 하고 게임에 뛰는 것은 사실 생각도 안했어요. 근데 이인규 선배님께서 게임 앞두고 연습하다가 발목을 다치신거에요. 제가 바로 투입된 거죠. 처음에는 긴장을 많이 했는데 ´해보니 별거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죠. 이런 말하면 건방지다고 할 수도 있는데 오랫동안 준비를 많이 해서 그런지 자신감이 생겼어요.


프로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많을 것 같은데.

- 에피소드보다는, 그냥 정신없이 달려왔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막내로서 형들 뒷바라지 하면서 재미있었고. 지금은 고참으로서 후배들 이끌면서도 나름 재미가 있고요. 어렸을 땐 경기지면 샤워도 안하고 이불 덮고 그냥 잤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가 버저비터로 게임을 이겼을 때 가장 짜릿했던 것 같아요. 작년에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SK와 경기했을 때 그 버저비터. 그때 팬들이 동영상 올렸는데 지금도 우울할 때 가끔 다시 봐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원치 않는 두 번의 이적을 경험했죠. 나래에서 신인왕을 받고난 다음해 신기성에 밀려 삼성으로 이적했고, 삼성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FA로 서장훈 아성에 밀려 다시 KT&G로 팀을 옮겨야했는데.

- 나래에서 삼성으로 이적할 당시에는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최 감독님이 저한테 더 크라고 하신 결정 같아요. 나래보다는 삼성이 더 큰 그룹이고 시설도 좋고 하니까 ‘큰물에서 놀아라’ 그런 생각이 있으셨던 거죠.

삼성에서 이적했을 때도 뭐 일단은 서운했죠. (서)장훈이 형이랑 3년 동안 뛰면서 팀이 장훈이형 위주로 맞추려고 하다보니까. 근데 이해는 해요. 장훈이 형이 저보다 농구를 잘하니까. 정말 최고의 포인트가드라고 생각한다면 저도 빛나고 장훈이형도 빛나도록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만일 지금 다시 장훈이형이랑 같이 뛰라고 한다면 그때는 예전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당시 신기성-서장훈과 관계는 어땠나요?

-뭐 장훈이 형하고도 친했었고, 기성이형은 대학 때부터 잘 알던 사이였죠. 단지 프로와서 잠시 서먹했었죠. 삼성에 와서 나래와 경기하면서 마주쳤을 때, 물론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했었고, 이기려고 했었어요. 지금도 그렇고 다음 시즌도 그렇고 앞으로도 늘 이기고 싶어요(웃음).

외곽슛에 약점을 보였던 주희정은, 삼성 시절 고 김현준 코치를 만나 슛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꼽히는 주희정이지만 한때는 약점(혹은 선입견)도 많았다. ‘외곽슛이 약하다’ ‘김승현에 약하다’ 같은 평가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 프로에 와서도 처음엔 슛 연습을 거의 안했어요. 그런데 삼성에 가서 고 김현준 코치님을 만나면서 슛의 필요성을 깨우치게 됐죠. 제가 데뷔 첫해 3점슛 성공률이 17% 정도밖에 안됐어요. 평균득점은 10점 넘게 했었는데 다 2점인거죠(웃음). 안 되겠다 싶어서 슛을 연습하기 시작했죠. 제가 몇 년 전에 어깨 수술을 받아서 지금도 정석적인 폼은 아닌데 많이 변형된 거죠.

(김승현 징크스에 대해)제가 01년 우승 이후 김승현 선수가 오리온스 신인으로 들어왔는데. 저희 팀(삼성)이 우승 다음해 플레이오프에 떨어졌어요. 그런데 김승현 선수는 그해에 MVP와 신인왕을 휩쓸었죠.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주희정은 김승현에 약하다?’ 그런 말들이 나오니까 저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고 휩쓸리는 거예요.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갔던 것 같아요.


포인트가드로서 롤 모델이 있나요?

- 당연히 강동희 선배님(동부 코치)이죠. 제가 중학교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강동희 선배님이었어요. 프로에 와서 처음 함께 경기를 했는데 잘 막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믿기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우러러 보던 선수와 경기를 하니까 기분이 되게 좋은 거예요(웃음).

강동희 선배님에게서 경기조율 등을 많이 보고 배웠죠. 본인이 어시스트 해나가면서 팀 동료들에게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팀이 어려울 때는 자신이 직접 나서 팀 분위기를 살리고. 한마디로 ‘코트의 여우’였죠. 그렇게 코트를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이 부러웠었죠.


이제 베테랑 선수가 됐는데. 주장이자 선배로서 후배들을 다룰 때 제일 힘든 점은 뭔가요?

-경기할 때죠. 제가 평소에는 조용하고, 후배들에게도 장난도 많이 치는데, 경기할 때는 좀 많이 무서운 선배가 돼요. 특히 코트에 뛰었을 때 똑같은 실수를 하면 정말 용서가 안돼요. 한번 실수를 하고 또 다른 실수를 하는 것은 상관없는데 그 실수를 또다시 했을 때는 정말. 입에서 막(웃음).


■ ‘애처가 혹은 공처가’ 주희정

농구계에서 유명한 애처가로 불리잖아요. 부인(박서인씨)은 언제 처음 만나게 된 건가요.

- 삼성이 우승하던 시절에 황진원 선수가 신인으로 저희팀에 왔었어요. ‘형 소개팅 한번해보지 않을래?’ 하길래, 친구의 친구로서 그렇게 만나게 된 거죠. 와이프는 사실 처음엔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했었죠. 아무 말도 안하고 친근감 있게 대하지도 않고, 저는 솔직히 마음에 들었거든요(웃음). 근데 제가 정작 호감이 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잘 못해요.


부인의 마음을 어떻게 돌렸나요?

-두 달쯤 지나서 통화를 했었어요. 그때 거의 자정쯤에 전화 걸면 아침 여섯시까지 통화를 하곤 했을 거예요. 오해 하신거라고(웃음). 진원이한테도 도와달라고 부탁했죠.

주희정은 삼성 시절 팀 동료 황진원의 소개로 부인 박서인 씨와 처음 만났다.


나중에 연인이 되고나서 두 분은 서로 배우자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나요?

- 글쎄, 와이프도 가끔 저한테 물어봤는데. 확실하게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솔직히 저는 그냥 얼굴이 예뻐서 좋았거든요(폭소). 와이프도 제가 그냥 착하고 성실해보여서 좋았다고 해요.


결혼 후 부부싸움은?

- 요즘은 거의 안하는데요. 애가 생기기 전만 해도 정말 사소한 걸로 많이 싸웠어요. 한번은 와이프한테 운전을 한번 가르쳐주다가 대판 싸우기도 하고요. 또 제 성격 때문에. 제가 농구에 너무 열을 다하니까 집에도 잘 안 오고 가정에 소홀하고 하니까, 그런 때 싸우게 되더라고요.


한번 싸우고 나면 화나있는 부인 마음을 어떻게 풀어주시나요?

- 안 풀어요. 그냥 제가 짐 싸서 나가요. 짐 싸서 그냥 숙소로 바로 가요. 가서 한 열흘 정도 지나면 제가 수그러들어서 먼저 문자를 보내요.


처가댁에서는 주희정 선수를 처음 봤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 밖에서 처음 장모님을 뵈었죠. 그때 와이프랑 ‘결혼하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실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처가댁을 찾아갔었어요. 그래서 맞을까봐(웃음). 사람들의 이목도 있어서 밖에서 만났죠. 저는 이 여자다 싶어서 빨리 결혼하고 싶었구 안정된 생활을 원했기 때문에 와이프를 살살 달래고 설득했죠. 그리고 일단 장모님을 먼저 만나야 설득이 가능할 것 같아서. 장인어른이 해병대 출신이셨거든요.

막상 뵈니까 아무 말도 안하셨어요. 별다른 표정도 없으시고, 오직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느냐’ 그것만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저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답했죠. 나중에 장인어른을 뵐 때도 그랬고. 결혼하고 나서는 오히려 장인어른·장모님께 가족의 정, 부모의 정 같은 것을 많이 느꼈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여의고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던 주희정에게 뒤늦게 찾아온 가정의 행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저는 어렸을 때 꿈이 화목한 가정을 꾸미는 게 꿈이었어요.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가족들에게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죠.

(두 딸들에게는) 그냥 좋은 아빠가 되고 싶죠. 애들이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고,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근데 아이들 키우는 게 참 힘든 게 애들 눈높이도 맞춰야하고, 애들이 뭘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아야하고, 제일 힘든 것은 애들이 땡깡을 많이 부리고 조르니까(웃음). 하지만 어쩌다 아이들에게 가끔 큰소리라도 치고 나면 제가 마음이 더 아파요.

"그냥 좋은 아빠가 되고 싶죠. 애들이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고,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여느 평범한 아빠와 다름없었다.


아이들이 만일 훗날 운동에 재능이 있다면 시킬 생각이 있나요?

- 아뇨, 전혀요. 절대 운동은 안 시킬 거예요.


그럼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농구선수를 남자친구로 데려온다면?

- 지금으로선 반대하고 싶어요. 운동선수의 아내로서 산다는 게 참 힘들거든요. 운동선수 일상을 맞춰가면서 사는 자체도 힘들고.


그럼 따님이 만일 ‘아빠도 농구선수인데 엄마랑 결혼했잖아’라고 하면?

- 하하하. 정말, 정말 되도록이면 그런 상황을 안 만들어야 하는데, 만일 정말 둘이 죽고 못 사는 사랑하는 사이라면 허락을 해줘야죠.


만일 그 선수가 ‘97년 주희정’처럼, 성장 가능성은 많은데 아직은 빛을 보지 못한 수련선수라면?

- 아! 그럼 제가 그 사위될 사람을 데려다가 훈련을 시켜야죠. 기회도 많이주고 훈련을 많이 시켜서 반드시 훌륭한 선수를 만들어야죠.


■주희정의 현재 혹은 미래

비시즌에 대표팀에 차출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체력적으로 부담도 될텐데.

- 작년에도 대표팀에 차출됐다고 전혀 부담이 되는 게 없었고요. 제 입장에서 비시즌에 오히려 대표팀에 훈련 갔다 오면 시즌 때 도움이 더 많이 됐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 상태가 다운이 될 수 있으니까 체력을 끌어올리는데도 도움이 되고. 태극마크를 단다는 것은 큰 영광이구요. 앞으로도 뽑아주신다면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대표팀 주장을 해본 선수로서 대표팀의 이런 환경 같은 건 달라졌으면 하는게 있다면?

- 농구가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그런지, 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좀 아쉽죠. 대표 선수들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어요. 태릉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고요(지난 시즌에 대표팀은 연습장을 구하지 못해 지방을 전전했다). 그래야 밑에 후배들도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할 거구요. 그런 발판을 많이 마련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주희정은 10년 후에는 플레잉 코치, 20년 후에는 감독이라는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앞으로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전력이나 국제 경쟁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지금 하승진(전주 KCC) 선수가 올해 들어 많이 성장했고요. 앞으로 젊은 선수들이 잘해준다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봐요. 작년에 세계최종예선에서 캐나다에 아깝게 졌을 때도 팀 분위기는 좋았어요. 높이에서 밀리다보니 패해서 그렇지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 같아요.

남은 비시즌은 어떻게 보낼 계획이세요?

- 몸이 안 좋은 데는 치료도 좀 받고요. 가정에도 충실하고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하고, 대표팀도 이제 준비를 해야 하고요. 서서히 하나씩 준비를 해나가야 할 시점이죠.


10년 후, 20년 후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요?

- 10년 후에는 플레잉코치 겸 선수로 코트에 있을 것 같아요. 20년 후에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코트 위에서 선수들을 지휘하는 감독이 되어있지 않을까 싶어요. 모든 선수가 그렇듯 마지막 목표는 감독이 되는 것이거든요. 제가 감독이 된다면 카리스마도 있고, 선수를 포용할 수 있는 그런 감독이 되고 싶어요.



주희정은 어떤 질문에서도 주저하거나 에둘러가지 않았고, 때로는 솔직하게 때로는 거침없이 성의를 다해 인터뷰에 임했다. 성공한 사람 특유의 교만함이나 의도적으로 포장된 겸손함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꿈을 쫒아 한길만을 걸어온 남자의 우직한 뚝심 혹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대화를 하는 간간이 주희정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 혹은 콤플렉스마저도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스스럼없이 고백하고 솔직히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것이 주희정이라는 사람에 대한 실망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단점마저도 인간적이고 진솔한 매력으로 바꾸어놓는 그런 힘이었다. ‘MVP’나 ‘전설’ 주희정보다도 더 사람들을 끄는 매력은 바로 이러한 ‘인간 주희정’인지도 모른다.[데일리안 = 이준목 기자]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이준목 기자
기사 모아 보기 >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