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요계 유통 환경은 급변했다. 방송 무대 중심의 전통 미디어 노출이 줄어들고 유튜브와 틱톡 등 온라인 플랫폼이 주력 채널로 자리 잡았다.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콘텐츠 소비 구조가 빠르게 구축되며 비주얼과 콘셉트, 숏폼 영상에 강점을 지닌 여성 아이돌 그룹들이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엔하이픈
이러한 흐름은 아이돌 시장의 판도 변화를 불러왔다.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 등 4세대 여자 아이돌 그룹은 팬덤에만 의존하지 않고 대중성과 화제성까지 동시에 잡으며 광고, 예능, 뷰티 업계 전반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베이비몬스터, 미야오, 키스오브라이프, 아일릿, 키키 등 5세대를 노리는 그룹들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상황이다. 반면 남자 아이돌 그룹은 팬덤의 화력을 기반으로 한 수익 구조를 선택하며, 대중성과 화제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팬 중심의 활동에 집중하는 흐름을 보였다. 이로 인해 광고, 예능, 뷰티 등 대중 노출이 중요한 영역에서는 여자 아이돌에 비해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실제로 2024년부터 2025년 상반기 시청률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게스트 라인업을 보면 아이돌 출연자의 대다수가 걸그룹임을 알 수 있다. ‘1박 2일’에는 뉴진스와 엔하이픈이,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뉴진스 민지와 있지가, ‘유 퀴즈’에는 라이즈와 차은우, 지드래곤, 장원영과 안유진, 투애니원, 제니, 로제가 출연했다.
이는 아이돌 게스트가 자주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욱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런닝맨’의 경우 2024년부터 2025년 상반기 사이 르세라핌, 아이들, 아이브, 엔믹스, 베이비몬스터의 멤버들이 출연한 반면 보이그룹 멤버는 단 한 명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놀라운 토요일’에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스트레이 키즈, 비투비 세 그룹이 게스트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르세라핌, 에스파, 트와이스, 아이들, 오마이걸, 있지, 여자친구, 아이브, 베이비복스가 시청자를 만났다. 이중 2020년 이후에 데뷔한 보이그룹은 엔하이픈과 라이즈 단 두 그룹 뿐이다.
이 같은 현상 뒤에는 남자 아이돌의 전략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많은 보이그룹이 글로벌 팬덤을 겨냥해 해외 중심 활동에 집중하면서 음악과 콘텐츠 역시 팬층을 겨냥한 방향으로 제작됐다. 그 결과 스트레이 키즈는 지난해 12월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해당 차트에 6개 앨범을 연속 1위에 진입시킨 최초의 아티스트가 됐다. 빌보드에 따르면 2023년 7월부터 2024년 8월까지 월드투어를 개최한 엔하이픈은 약 6,300만 달러(약 870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
에이티즈와 싸이커스의 소속사인 KQ엔터테인먼트는 2022년 매출 464억 원, 영업이익 44억 원에서 2023년 매출 1158억 원, 영업이익 125억 원을 기록하며 2년 사이 영업이익이 184% 상승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복수의 가요 관계자는 “해외로 팬덤을 확장하는 전략이 수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며, “투어와 굿즈 판매가 수익의 중심이기 때문에 국내 활동 대비 수익성은 더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팬덤 중심 전략은 활동 기획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수의 보이그룹이 팬덤 타깃형 콘텐츠 개발, 등을 통해 충성도 높은 팬층과의 접점을 넓히는 데 집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븐틴의 자체 콘텐츠 ‘나나투어’다. 해당 콘텐츠는 방송 당시 시청률 1~2%대를 기록했지만 팬 플랫폼을 통해 높은 수익을 올렸다. 위버스에 공개된 풀버전은 누적 조회수 1억 3000만 건을 돌파하며 세븐틴 역대 VOD 판매량 신기록을 세웠다. 총 8회차 분량이며, 편당 판매 가격은 3만 7000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그 성과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나나투어’는 위버스를 통해 포토카드, 단체사진, 페이퍼 액자 등의 공식 머치를 함께 판매했는데, 1차 판매분은 발매 5분 만에 완판됐고 2차 판매분도 18분 만에 전량 소진됐다. 팬덤 중심 전략만으로 수익성과 성과를 모두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결과다.
업계에서는 보이그룹이 국내 시장 자체를 전략적으로 후순위에 두고 있다고 분석한다. 다만 이러한 흐름이 단기간에 바뀌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지금은 음원 차트나 방송 노출보다, 글로벌 음반 판매와 해외 투어에서 나오는 수익이 훨씬 크다”며 “굳이 국내 활동에 시간을 쏟기보다 해외 팬덤을 공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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