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바둑의 제왕①>중국세 급성장…축소되는 각종 기전 ´위기´
이세돌-구리 양강 속 이창호·박영훈·최철한 등 부활 여부 관심
한국 바둑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전제가 붙어 있다. ‘아직까지는’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바둑은 ‘바둑 역사상 최고수’로 평가받는 이창호 9단을 필두로 세계 바둑계에 군림해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한국 바둑계 곳곳에서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국제기전에서 예년과 비교해 부진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작년 7월, 지난 10여년간 한국이 단 한 차례도 중국과 일본에 우승을 양보한 바 없던 후지쓰배의 우승을 중국이 가져가면서부터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 중국의 구리 9단은 그동안 한·중·일 프로기사들이 인정하는 중국의 최강자이면서도 세계대회에서 번번이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치는 바람에 붙여진 별명인 ‘세계 최강의 아마추어’라는 불명예에서도 벗어나게 됐다.
“한국 바둑의 위기는 단순히 승부 결과에만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 손종수 세계사이버기원 사업본부장 겸 <일간스포츠> 농심 신라면배 관전기자는 작년 <월간조선> 8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은 제10회 LG배(2006년), 제6회 춘란배(2007년), 제21회 후지쓰배(2008년)에서 우승한 구리와 제5회 잉씨배(2004년), 제11회 삼성화재배(2006년)를 제패하고 제9회 농심 신라면배(2007년)에서 우승한 창하오가 ‘타도 한국’의 쌍두마차로 나섰는데 한국의 이창호(제20~21회 후지쓰배 연속 준우승, 제10~11회 삼성화재배 연속 준우승, 제3회 중환배 우승)는 예전 같지 않고 그 자리를 대체한 이세돌(제12회 LG배, 제12회 삼성화재배, 제3회 도요타덴소배 우승)은 아직 불안정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바둑 위기론의 배경’에 대한 정밀한 진단도 이어졌다. 손 본부장은 “관측자들이 주목하는 ‘한국 바둑의 총체적 위기’는 한국 프로들의 세계대회 입상이나 우승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단순한 승부 결과에만 있는 게 아니다”고 지적하고 “한·중·일 3국의 힘겨루기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일본이 한·중 양국에 현저히 밀리고 한·중 양국은 백중지세”라면서 “승부만을 따지면 치열한 경쟁의 상황이지, 위기까지 거론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손 본부장은 그러나, “관측자들의 생각은 좀 더 포괄적”이라며 “생산(프로), 유통(바둑유관업체), 소비(바둑마니아)를 모두 포함시킨 시장의 개념으로 시선을 맞추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항상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며 세계대회의 시스템을 선도해 온 삼성화재배가 사실상 기전 축소를 뜻하는 격년 개최를 선언했고, 40년 전통의 왕위전이 개막을 미루고 있다”며 “기성전, 신예프로 10걸전도 위태롭다는 소문이 떠다닌다”고 전했다.
손 본부장은 “지금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한때 국내 최고 전통을 자랑하는 국수전조차 후원기업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도 들린다”며 “충격적인 사실은 존폐가 거론된 기전들의 후원 기업이 재계 랭킹 최상위의 KT, 현대자동차, SK, 기아자동차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전 활성화, 보급 활동 확대, 신진세력 육성이 위기 탈출법
저명한 바둑평론가인 한창규 씨 역시 올해 초 바둑 전문 사이트인 ‘사이버오로’에 기고한 박치문 <중앙일보> 바둑전문위원, 이홍렬 <조선일보> 바둑전문기자, 박영철 <한국일보> 객원기자, 엄민용 <스포츠칸> 종합뉴스부 차장, 구기호 <월간바둑> 편집장 등과의 대담 형식의 기사에서 ‘한국 바둑의 위기설’에 대한 심도 있는 진단을 한 바 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박 전문위원은 “어려운 시기에 경제위기까지 맞물려 어떤 한파가 몰아칠지 걱정부터 앞선다”면서 “그런 상황에서 물꼬를 튼 상금제가 발판을 마련한 것은 다행스럽다. 다만 시행까지엔 험난한 과정이 따를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갈는지는 걱정스러운 대목”이라고 우려했다.
박 전문위원은 또 “바둑은 인기를 먹고 사는 종목”이라고 규정하고 “과거처럼 세상과 단절된 채 유유자적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세상 밖으로 나와서 홍보 활동에 머리를 싸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전문기자는 “바둑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역시 프로기사와 그들이 뜻을 펼치는 운동장 격인 기전”이라고 전제하고 “경기침체기를 맞아 기전의 축소 또는 폐지 사태가 걱정된다”며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바둑계 구성원 모두가 각 기업을 향한 좀 더 능동적인 기전 확보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기자는 “기전 개혁의 문제를 한시 바삐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오래 끌다간 자칫 기단 분열이라는 극단적인 사태까지 초래할지 모른다”며 “기전 오픈이나 상금제 도입 등의 전면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기자는 이어 한국 바둑의 오래 묵은 딜레마 중 하나인 이창호·이세돌 투톱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를 우려했다. 그는 “신진 세력의 적극적인 육성이 필요하다”며 “일례로 농심신라면배 등의 와일드카드를 새 얼굴에게 주는 것도 방편이 된다. 눈앞의 우승을 노려 톱 기사한테 주던 관례를 과감히 탈피해 발전 가능성이 큰 신예들에게 주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엄 차장은 전통 기전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우려했다. 그는 “왕위전·기성전 등 전통의 신문기전이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그동안 신문기전은 한국바둑의 맥을 이어왔다. 바둑 홍보에 큰 역할을 해온 신문기전이 살아야 바둑계도 산다”고 주장했다.
엄 차장은 또한 “(재)한국기원과 (사)대한바둑협회 간의 불협화음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너 따로, 나 따로인 ‘따로 국밥’ 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관계 정리는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구 편집장은 “세계적인 경제 상황의 여파가 바둑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 직접적인 요인은 바둑 인구의 감소고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젊은층으로 내려갈수록 감소폭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 편집장은 “기전의 활성화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보급 활동의 증대가 최대 현안이라 생각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프로기사들이 팬들과 자주 만나야 한다. 지역팬들을 수시로 찾아가야 한다. 보급 활동은 바둑계 전체가 나서 전력을 기울어야 할 과업”이라고 강조했다.
“올해가 한-중 바둑 전쟁의 분수령이 될 것”
이날 대담 기사에서 이들 바둑 전문가들은 최근 한국 바둑을 무섭게 추격해오고 있는 중국 바둑에 대한 전망도 내놨다.
먼저 이홍렬 전문기자는 올해를 한-중 간의 주도권 다툼의 분기점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국제적으로 한-중 양대 세력의 주도권 다툼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면서 “공교롭게도 상반기에 후지쯔배를 제외한 전 국제기전 결승이 몰려 있고 한-중 양국이 백중하게 맞서 있다”며 “이 대회들이 끝나는 결과에 따라 세계 판도도 재편될 공산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이세돌과 이창호, 구리로 압축된 개인 패권 싸움 역시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라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는 한국이 중국보다 전망이 밝다는 낙관론을 펼쳤다. 그는 “세계적으로는 한-중의 주도권 다툼이 계속될 것인데 숫자상으로 한국의 판세가 괜찮다”면서 “지난해보다 비교적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기자는 “응씨배와 도요타덴소배 우승을 각각 한국과 중국이 확정지은 상태에서 삼성화재배·LG배·춘란배에서 한-중 결승 대결을 벌인다”며 “삼성화재배(이세돌-콩지에)와 춘란배(이창호-창하오)는 한국이 조금 우세해 보이며 LG배가 제일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반면 엄민용 차장은 중국의 물살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과거 한국의 ‘소소회’ 등이 집단 연구를 했던 것처럼 중국은 마샤오춘 감독 하에 집단 훈련의 강도가 엄청 높다”면서 “새해는 중국의 성장 속도가 농익어 한층 위협적으로 다가올 것”이라며 “지난해는 이세돌·이창호의 활약으로 한국이 우위를 보였지만 올해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창호·최철한·박영훈 부활이 관건…인터넷바둑은 꾸준한 성장세
2009년 초 현재 세계 바둑계의 형세는 한국의 이세돌 9단과 중국의 구리 9단을 정점으로 한국의 이창호 9단과 박영훈 9단, 최철한 9단 등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냐는 게 주된 관심사다. 중국의 창하오 9단의 성적 역시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특히 중국의 구리 9단은 지난 6일 시작된 도요타덴소배 결승에서 박문요 5단에게 1승을 거두며 순항하고 있어, 한국의 이세돌 9단이 구리 9단의 승승장구를 막아낼 수 있을지가 한국 바둑계의 ‘발등의 불’이다.
한국의 이세돌 9단은 지난해 12월까지 ‘15개월 연속 국내 랭킹 1위’를 차지하며 이른바 ‘이창호 10년 천하’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의 구리 9단도 지난해 11월 중국 명인전에서 박문요 5단에게 2연패 후 3연승의 역전극을 펼치며 우승하는 등 6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두 사람 다 말하자면, 파죽지세다.
반면 지난 10년 동안 세계 바둑계에서 ‘바둑 그 자체’로 상징되던 이창호 9단은 최근 성적이 예전 같지 않다. 이는 ‘이창호 9단에 거는 한국 바둑팬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이창호 9단에게는 올해 3월 열릴 응씨배 결승전이 ‘부활’과 ‘장기 침체’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문제는 결승 상대가 한동안 ‘이창호 킬러’로 이름을 높였던 ‘독사’ 최철한 9단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난 2004년 이후 극도로 부진했던 최 9단은 지난해 승률 1위(76%)를 기록하며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어, 응씨배 결승전의 승부 결과에 따라 이창호 9단과 최철한 9단의 운명이 엇갈릴 수도 있다.
또 지난해 부진했던 박영훈 9단의 부활 여부도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할 대목이다. 이 외에도 농심배에서 5연승을 거두며 일약 스타로 떠오른 강동윤 9단의 성적도 마찬가지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2008년 현재 한국의 바둑 인구는 약 766만 명이다. 한국기원이 지난해 말 펴낸 <2009 대한민국 바둑 백서>에 따르면, 바둑 인구는 지난 1992년의 1000만 명을 정점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바둑 인구의 숫자적인 감소보다 더 큰 문제는 바둑 인구의 고령화 현상이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인터넷 바둑 이용자의 꾸준한 성장세다. 2008년 현재 인터넷 바둑 이용자 수는 약 250만 명이고, 대국 사이트의 1일 최대 동시 접속자 수는 7만5850명(외국 서버 포함)에 달하고 이들이 하루 동안 두는 대국 수는 60만 판 정도인 것으로 조사됐다.
희망의 증거는 또 있다. 지난해 한국기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80% 이상은 바둑이 자녀 교육에 유익하다고 인식하고 있고 10명 중 9명이 자녀에게 바둑을 가르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 바둑의 내일을 이끌어갈 유소년 바둑 인구는 다소 감소세로 돌아서는 추세지만, 그 자리를 인터넷 바둑 사이트들이 교육 기능을 강화해 대신하고 있다. 작년 현재 전국의 바둑교실 수는 총 517개라고 한국기원 측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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