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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의 은퇴일기⑨] 사람, 풍경 그리고 미소…산책의 즐거움


입력 2022.09.27 14:01 수정 2022.09.27 10:24        데스크 (desk@dailian.co.kr)

산이 가까이 있어도 자주 오르기는 쉽지 않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신체를 단련하기에는 서울 둘레길 산책이 안성맞춤이다. 나태해지려는 마음과 신변상 문제로 어려움이 있겠지만 ‘작심 3일’이 되지 않게 꾸준히 실천해 보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비가 와서 우면산 계곡에 많은 물이 흐르는 모습ⓒ 비가 와서 우면산 계곡에 많은 물이 흐르는 모습ⓒ

침대에서 눈을 뜨자 ‘우두둑 뚝’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커튼을 열자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시커멓다. 아내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다. 가기 싫은 눈치다. 머릿속에서는 ‘비가 오는데 우산을 쓰고 가야 하나, 아니면 집안에서 간단히 몸풀기만 하고 하루 쉴까? 아니야, 그래도 가야 해. 매일 산책하기로 약속한 지 며칠 되었다고’하는 두 마음이 다툰다. 과거의 예를 보아 하루 쉬게 되면 자신과의 다짐이 흐지부지되기에 십상이다.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 등산화를 신었다.


비가 안 올 때는 6시가 좀 지난 이른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비 맞으며 운동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썩은 나뭇가지는 비를 머금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우두둑 떨어진다. 운 나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것 같다.


비가 와서 쓰러진 나무ⓒ 비가 와서 쓰러진 나무ⓒ

갑자기 은은한 종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들리는 아름다운 소린가 했더니 예술의전당 분수대 앞 시계탑에서 7시를 알리는 소리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라 정감이 간다. 어릴 적 시골의 조그만 예배당에서 밧줄을 당겨 종 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참 정겨운 풍경인데 지금은 소음 문제로 거의 사라졌다. ‘도심에서 성당이나 교회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젖어본다.


산책길에는 까치와 딱따구리와 같은 상쾌한 새소리와 매미들의 윤창이 쉼 없이 이어지고 청설모도 가끔 나타나 인사를 한다. 개망초, 맥문동을 비롯한 들꽃과 보기 드문 노란 망태버섯도 내 카메라에 담긴다. 비가 자주 내려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는 주위의 잡음과 망설였던 나의 두 마음도 모두 삼켜버린다. 비록 옷이 젖을지라도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에 젖은 노란 망태버섯ⓒ 비에 젖은 노란 망태버섯ⓒ

우산을 쓴 채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여자분이 우리가 지나가도록 비켜서 준다. 좁은 등산로라 양보를 해 준 것이다. 얼굴을 들어 언뜻 보니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나도 엉겁결에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나치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분의 미소를 보는 순간 1/3이 떨어져 나간 신라 시대 기왓장에서 본 미소가 떠올랐다. 스쳐 지나가면서 언뜻 본 여자분의 배려심이 듬뿍 배어 있는 친근한 미소가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 옅은 웃음이 얼마나 다정스럽게 느껴졌던지 불교에서 말하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미소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쉬운 행동임에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나이가 들수록 웃는 일이 적어지고 얼굴이 무표정해지는 것 같다. 내성적인 데다 말이 별로 없으니까 아내는 차갑게 보인다며 자주 웃어보라고 한다. 그렇다고 실없이 그냥 웃기도 남사스럽다. 그 여자분의 자연스러운 미소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오늘 하루 모든 시름을 상쇄하고도 남는 큰 기쁨과 감동을 맛보았다.


우면산 소망탑 앞에서 두손 모아 기도하는 등산객ⓒ 우면산 소망탑 앞에서 두손 모아 기도하는 등산객ⓒ

상대방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우연히 보낸 친근한 미소가 큰 울림으로 다가와 위안을 받거나 희망의 씨앗을 심어줄지 누가 알겠는가? 짜증 날 일 있으면 잠시 심호흡을 하며 웃어보아야겠다.


산책로는 서울 둘레길과 이어져 있어 대부분 평탄한 길이지만 우면산 정상인 소망탑까지는 266개의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온몸에 구슬땀이 흘러내린다. 아침 이른 시각인데도 무거운 통을 짊어지고 올라온 아이스케이크 장수는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등산객들의 자비스러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간절한 눈길을 피하지 못하고 두 개를 산다. 단단한 아이스케이크를 깨물어 삼키면 차가운 느낌이 식도를 타고 주르르 내려가 달아오른 속을 시원하게 식혀주면서 어릴 때 빈 병을 주고 바꿔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고, 힘들어하는 몸에도 휴식을 준다. 맑은 날은 북한산, 도봉산과 수락산 같은 서울 북쪽의 산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는데 도시는 뿌연 안개 속에 잠겨있다.


어르신 몇 분은 핸드폰의 보건체조 음악을 틀어 놓고 몸풀기를 한다. 옛날 학교 다닐 때 하던 동작과는 좀 달라 보였지만, 경쾌한 음악과 간결한 구령은 귀 익은 소리다. 함께 하고 싶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몇몇 여자분들은 훌라후프를 돌리며 몸을 풀기도 하고 다리를 난간 끝까지 올린 채 유연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나도 다리를 뻗어 난간으로 들어 올려 몸을 풀고 싶지만 올라갈지도 모르는 데다 잘못하여 넘어지기라고 하면 창피를 당할 것 같아 허리 돌리기와 거꾸로 매달리기와 같은 운동기구로 몸풀기만 좀 할 뿐이다.


비가 오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산책하는 모습ⓒ 비가 오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산책하는 모습ⓒ

두 손을 합장한 채 소망탑 주위를 돌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저리도 간절히 돌탑에 고개를 숙일까? 정상에서 불던 퉁소 소리는 한참을 내려올 때까지 아련하게 들려와 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비가 오는 가운데도 게을러지려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산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거웠던 몸도 가뿐해진 것 같다. 육체적인 상쾌함도 좋지만, 산책로에서 스치는 등산객들과 말없는 교감도 즐거움이다. 앞으로는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가벼운 눈웃음이나 미소를 지어봐야겠다. 산책을 통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빠지지 않고 다녀보리라 다짐해 본다.


ⓒ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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