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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6>] 술빚


입력 2022.06.24 14:01 수정 2022.06.20 15:09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

제16화 술빚


시내버스가 딴에는 열심히 달린다고 달렸지만 정류장마다 정차하느라 평균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딱히 정해둔 목적지가 없어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문득 집으로 가려던 계획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도반(道伴)에게 전화해 볼까. 어제 술값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도 볼 겸.


어제 나는 동료형사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와중에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한마디로 술 복이 터지는 날이었다. 하지만 선약이 중요했으므로 나는 동료형사들과 계속 술을 마셨고 도중에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못 간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동료형사들과의 술자리가 자정이 되기도 전에 생각보다 일찍 파하는 바람에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묵묵부답으로 지인이 전화를 받지 않자 나는 꿩 대신 닭이라고 도반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 도반은 열심히 택시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사납금을 채우고도 조금 남는다고 했다.


“술 한잔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지.”


“아니, 잘 됐어. 나도 마치려던 참이었어.”


내가 은근슬쩍 묻자 도반이 기다렸다는 듯 살갑게 대꾸했다. 도반이 내가 서있는 위치를 확인하더니 잠시 기다릴 틈도 주지 않고 금방 도착했다. 나는 도반의 택시 조수석에 냉큼 올라탔다. 도반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기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냐고 재차 물었다. 내가, 저번에 빚졌던 거 갚을 일이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하니 ‘그게 무슨 빚이야’ 하며 도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도반과 나는 술 앞에서만큼은 좌고우면하지 않는 불도저처럼 강한 추진력이 있었기에 둘이 만났다하면 으레 만취했다. 그래서 아내는 도반과 내가 어울리는 걸 징글징글해 하며 몹시 싫어했다. 나 역시 아내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어서 가급적 아내 앞에서는 도반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느 날 아내가 ‘술빚’에 관한 일화를 우연히 듣고는 도반에게 그대로 갚아주라며 쾌히 한 번의 만남을 승낙했다. 그게 공교롭게도 지인이 전화를 받지 않는 바람에 오늘 문득 생각난 것이었다.


도반은 차고지에 도착해서 사납금과 전날의 미수금까지 담은 봉투를 금고에 집어넣더니 비치된 장부에 내역을 기재했다. 도반이 콜을 부르자 이내 동료택시 한 대가 쪼르르 달려왔다. 우리는 선배가 운영하는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반에게 ‘술빚’을 지게 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문청 삼총사의 멤버인 한종탁을 만나 통음을 하게 되었다. 통음은 술 앞에서 자유를 맘껏 구가하는 도반 같은 친구와 함께할 때 가능한 일이었지 한종탁과는 거리가 먼 이벤트였다. 한종탁은 아내에게 삼세번 전화가 오기 전에 먼저 술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공처가였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배짱이었는지 아내가 세 번째 전화를 해오자 배터리를 빼버리는 것이었다.


택시기사가 근무 교대를 하는 시간이자 환경미화원이 거리 청소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녘에도 한종탁과 나는 해장국 집에서 끈질기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계바늘이 다섯 시를 가리키는 그 시각에 귀가했다간 아내에게 무참히 온몸이 쥐어뜯길 거라 판단한 우리는 집으로 향하는 대신 소주 두 병을 사서 근처 모텔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 아까 했던 이야기 또 하면서 기어코 소주 두 병을 다 마시고나서야 정신을 잃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 아홉 시였다. 방 안 가득 술 냄새가 진동했고 온몸이 숙취로 나른했다. 그런데 옆에 누워있어야 할 한종탁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내에게 백기 투항하러 아침 일찍 모텔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문득 처갓집에 가야할 일이 생각났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아내는 콩 심으러 친정에 가야한다며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선약을 잡아놓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지금 귀가했다가는 완전 초죽음을 당하겠다 싶었다.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려서 살 길을 모색해 보았다. 이대로 정신을 차린 채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한껏 취해서 들어가는 편이 아내의 예봉을 막아내는 데 유리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처벌수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심신미약 상태가 참작되겠지만 무엇보다 만취해 있으면 아내가 즉시 공격하지 못하고 내가 술을 깰 때까지 보류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세수만 하고 서둘러 모텔을 나섰다.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문청 삼총사의 또 다른 멤버인 도반을 떠올렸다. 도반과 나는 술자리에서 언제나 술지게미처럼 마지막까지 남아 우애를 과시하곤 했는데 몇 달 전 내가 참다 참다 결국 절교를 선언해버린 친구였다. 도반은 이혼한 이후로 술만 마셨다 하면 잠자코 있는 사람의 성질을 긁어대는 고약한 버릇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명 주사(酒邪)가 있는 술꾼이라서 도반은 어지간히 친했던 사람에게서도 술 약속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취하면 기분 좋아지는 것이야말로 음주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데 도반은 근본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 취했다하면 오만상을 찌푸리고 불평불만을 공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술자리 동석자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혼자만 역경과 고난의 인생을 살아 온 것처럼 언행이 거칠고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술을 마셨다 하면 연이틀 음주는 기본이고 종종 근무 중인 사람에게 전화해서는 취한 목청으로 대뜸 술 마시러 나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에 상대가 ‘대낮에, 것도 한창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술이냐’고 화를 내면 오히려 쌍욕을 퍼부으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무례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나는 도반에게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며 호통 쳐서 절교를 선언한 터였다. 뿐만 아니라 도반의 전화번호를 수신거부 목록에 등록해 버렸다. 그랬더니 한동안 줄기차게 걸려오던 전화가 언제부턴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문득 도반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요즘 들어 이틀 연속 마시는 처지다보니 도반의 주사를 탓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숙취 기운을 빌어 지체 없이 도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으나 도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절교를 선언한 이후 일절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도반 역시 내 전화를 안 받는 게 하등 이상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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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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