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집 ´운조루(雲鳥樓)´

입력 2007.08.08 10:59  수정

구례 금환락지와 운조루 아흔아홉칸 집

지난 7월 21일부터 데일리안과 함께 떠났던 7박 8일간의‘제3회 섬진강 지키기 대탐사’행사의 여섯번째 날의 일정 중 구례의 운조루에 대한 문화기행이 있었다.

빼어난 자연속에 오랜 고서화처럼 앉아있는 ´운조루´는 유명한 만큼 타 지역민들을 비롯하여 모르고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흔 아홉 칸의 위엄을 자랑하는 운조루 현재 칠십 삼간만이 현존하고 있다.

´구름속의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을 가진 ´운조루´로 지금부터 문화기행을 떠나보자.

운조루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아흔 아홉 칸 집으로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 (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 (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던가....이미 과거의 영화는 온데간데없이 운조루의 위염도 가슴 아픈 역사와 더불어 시간 속으로 사장되듯이 퇴락한 건축물의 곳곳에 켜켜이 먼지가 앉았다.

지금은 퇴락한 양반가일망정 솟을대문 앞에 걸린 호랑이 뼈는 과거의 위엄과 함께 위풍당당한 무장의 가문으로 액을 막고 자손의 번성을 꾀했던 조상의 정이 느껴진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기운이 강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집터에서 나왔다는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는 인공연못.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미 ‘섬진강 포럼’과 함께 지난 7월에 문화기행으로 다녀온 곳이지만 방대한 역사자료와 운조루에 대한 가치가 부담스러워 감히 글로 쓰지 못했다.

그도 그렇듯 류이주의 8세손 류응교(전북대 건축공학과)교수가 만들어놓은 운조루의 온라인 홈피를 방문해보면 너무도 자세한 운조루의 내역과 기타 많은 정보를 볼 수 있으니 대충 쓰려는 문화기행은 실례되는 일이 아닐 수 없잖은가.

더군다나 풍수지리학설로 보아 남한의 3대 명당이라는 지리산의 금환락지(金環落地) 명당터에 자리 잡았다는 그 유명한 운조루가 아닌가.

지리산의 해발 1506m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 섬진강 줄기와 만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는데 그 천하대지가 구례 들판 어느 곳엔가 위치한다는 비기가 전해 왔다.

액운을 막아주는 호랑이뼈가 달려있는 솟을대문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가 그곳이다. 구례읍에서 경남 하동포구 쪽으로 가는 19번 도로를 타고 약 5km쯤 달려가면 기름진 들판을 만나게 되는데 들판 아늑한 곳에 옹기종기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속칭 ´구만들´이라 부르는 이곳의 마을들은 모두가 금환락지 명당터를 잡기 위해 외지인들이 몰려와 개척한 곳이라고 한다.

금환락지(金環落地)란 옛 지사(地士)들이 말하길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 잡은 구례 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운조루 지킴이 류맹효씨, 류이주의 후손으로 한 평 남짓한 작은 간이 매점. 간단한 음료수 몇 가지와 운조루 관련 자료와 사진 등을 내 놓고 들어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이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가락지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 행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금환락지라는 곳은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운조루’ 홈피 글 펌)

이러한 천하의 명당 금환락지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양택지 운조루(雲鳥樓)를 세운 사람은 삼수공(三水公) 유이주(柳爾胄)였다. 유이주는 1726년 경북 해안면 입석동 출신으로 28세 되던 1753(영조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힘이 뛰어났고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 버렸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담대했다고 한다.


운조루가 유명한 것은 비단 아흔 아홉 칸의 기와집보다는 조상들의 선행으로 6.25동란의 이념 싸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타인능애(他人能解)라는 커다란 나무통으로 만들어진 쌀뒤주가 바로 그 선행의 징표이다.

한꺼번에 쌀 세가마니가 들어간다는 ‘타인능애’는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세월의 때까 켜켜이 앉아있는 운조루

가난한 소작인들이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이 ‘타인능애’에 와서 먹을 만큼의 쌀을 퍼갔다고 한다. 류씨 문중의 종부들은 대대로 이 쌀뒤주를 채우며 이웃들과 곡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빨치산들이 마을을 초토화 시킬 때도 약탈이나 방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나눔의 마음을 가졌었기 때문이란다.

200년이 넘는 ‘운조루’는 나눔의 마음, 이웃사랑을 실천해왔던 조상들이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과거를 뛰어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을 문화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쌀 3가마가 들어간다는 타인능애 뒤주(동그란 원통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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