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메가프로젝트' 발표 앞두고 재계 압박감 고조
뜯어말려도 돈 풀 매력적인 생태계 조성이 우선
G7 정상회의 참석 계기 이탈리아를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12일(현지 시간) 로마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이탈리아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반도체 말고도 업종별로 여기 저기 지역별 투자계획이 나올텐데, 엉뚱한 지역에 투자하라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 지역 대규모 반도체 공장 투자와 관련해 한 대기업 임원은 이같이 말했다. 이들 두 기업 총수와 대통령 간 릴레이 면담이 이어지면서 재계 안팎에서는 투자 압박이 타 그룹으로까지 번지는 게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룹 차원의 투자 결정은 계열사 중장기 자금 집행 계획과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현장은 상황을 면밀히 주시할 수 밖에 없다.
기업이 중장기 성장 전략에 따라 투자 로드맵을 수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기업의 자율적 투자 판단에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정치·사회적 프레임이 얹힐 때 발생한다. 이재명 정부는 '5극 3특'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앞세워 광주·전남을 중심으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청와대를 다녀갔고 면담 결과는 이날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상세히 드러날 예정이다.
여기에는 반도체뿐 아니라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AIDC), 배터리, 전력 인프라 등이 총망라돼있다. 반도체 뿐 아니라 이를 활용할 AI 생태계 전반에 대한 전방위적 투자가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적게는 수십조에서, 많게는 수백조 단위의 이 대형 프로젝트는 지역 균형 발전을 빌미로 삼성과 SK를 필두로 다른 대기업 그룹사까지 확산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국가 대항전으로 떠오른 AI·첨단 산업을 전 국토에 고르게 깔아 육성하겠다는 취지는 얼핏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 산업은 정부가 투자 지역과 시기를 점지해준다고 무작정 결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입지, 인력, 전력, 물류, 규제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말 그대로 장기 프로젝트다. 경영 판단 한 번에 기업의 생사가 갈릴 수 있는 만큼 신중한 검토가 필수적이다.
기업의 '신중 모드'와 달리 정부 발표와 실제 정책은 늘 괴리를 보여왔다. 그간 정부는 지방 청년 일자리 창출과 AIDC 등 첨단 산업의 비수도권 유치를 공언해왔지만 정작 기업들이 현장에서 줄기차게 요구해 온 핵심 제도 개선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대표 사례가 전력 조달 문제다. AIDC는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대표 전력 집약 시설이다. 업계는 LNG(액화천연가스)를 활용한 직접 전력구매계약(PPA) 확대를 요구했지만 끝내 법안에 담기지 못했다. 전력망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총선에서 후보들은 너나할것 없이 자신의 지역구에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그 구호와 달리 송배전망 확충, 전력계통 수용 능력 확보 방안 등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래 놓고 선거 청구서를 투자라는 명목으로 기업에게 들이밀고 있으니 산업계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산업계의 답답함은 이 뿐만이 아니다. 정부가 'AI 3강'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피지컬 AI의 경우 기업들은 "로봇이 학습할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로봇 데이터 생산을 위한 국가 차원 인프라·인센티브 설계가 걸음마 단계임을 지적했다. 인재 문제는 더 심각하다. 교통, 주거, 교육 등 정주 여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깃발만 꽂으면 인재가 몰려올 것이라는 생각은 정부의 순진한 상상에 불과하다.
정부는 반도체 클러스터 속도전을 위해 부랴부랴 공장 부지 등 기반시설을 최대 100%까지 국비로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 반도체특별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재정 지원이 투자 유인을 만들 수는 있어도, 사업의 본질적인 경쟁력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다. 정부가 측면 지원은 할 수 있어도 '판 깔아줄테니 무조건 여기다 투자하라'는 앞뒤가 바뀐 정책은 대기업에게 강요나 다름없다. 투자 명분·정책 지원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못하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 확신도 없이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서둘러 결정하라는 압박은 기업 중장기 로드맵을 정부가 결정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기업이 그간 지방 투자를 꺼려온 본질적인 이유를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전력, 인재, 정주 여건 등 전반적인 산업 경쟁력을 제고할 기초 생태계부터 다져야 하는 것이 순리다. 지금은 인프라가 없지만 나중에 보전해줄테니 일단 건물부터 세우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지역 소멸, 격차 문제는 일부 기업의 주머니를 털어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전체 생태계 밑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지고 기업이 스스로 투자 매력을 느낄 때 비로소 전체 그림이 완성된다.
그렇기에 정부의 메가프로젝트 보고회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기업 임원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정부가 재계를 압박해 지역 균형 발전을 일으키겠다는 구태의연한 발상은 내려놔야 한다. 뜯어 말려도 기업이 알아서 찾아오게 만드는 투자 환경을 제대로 구상하는 것이 정부의 진짜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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