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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탐구⑫] ‘비숲2’ 배두나, 리듬감 있는 몸짓과 말투…‘플란다스의 개’부터 톺아보기


입력 2020.09.01 08:59 수정 2020.09.01 14:29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한여진 속 배두나 ⓒtvN 제공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한여진 속 배두나 ⓒtvN 제공

드라마 ‘비밀의 숲’ 시즌2가 한창 방영 중이다. 배두나는 첫 등장부터 신선했다. ‘건어물녀’(직장에서는 매우 세련되고 능력 있지만, 퇴근 후엔 일에 지쳐 데이트를 즐기기보다는 집에 와서 대충 입고 대충 머리 묶고 맥주에 오징어 등 건어물을 즐겨 먹는 여성)라는 표현 그대로의 모습으로 침대에 반쯤 누워 SNS를 보고 있었다. 피규어를 좋아해 관련된 인물의 SNS를 둘러보다 예의 용산서 형사과 출신(현재는 경찰청 정보과에 파견 중) 경찰의 매서운 눈으로 통영 바닷가를 찾은 연인의 인생 사진에서 미심쩍은 요소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냥 건어물녀였다.


어! 싶었다. 그저 화장기 없는 얼굴이어서가 아니고 패션 감각 좋은 그가 홈웨어마저도 기막히게 잘 골라서가 아니라 뭔가 몸짓은 굉장히 여유롭고 말투에는 리듬감이 배인 게, 고쳐 앉아 화면을 보게 했다. 배경이 자기 집, 장소가 자기 침대라 그럴 거야(한여진의 집을 ‘자기 집’으로 느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드라마 '비밀의 숲2' 현장스틸. 단짝형사 장건(최재웅 분)과 한여진 ⓒtvN 제공 드라마 '비밀의 숲2' 현장스틸. 단짝형사 장건(최재웅 분)과 한여진 ⓒtvN 제공

경찰청과 용산서를 오가는 모습에서도 시즌1 때와는 사뭇 다른 리듬감이 느껴졌다. 드라마 속에서나 밖에서나 흐른 3년의 세월이 느껴지는 여유로움이 표정에서, 휘젓는 팔과 걸음걸이에서 느껴졌다. 능청스러우면서도 인간미가 배어 있는 말투가 듣기에 좋았다. 마치 배두나가 내뱉는 말이나 움직이는 동작들에 오선지가 그려지고 음표가 달리는 듯, 음악처럼 다가왔다. 다른 배역을 하지 않고 3년을 계속 한여진으로 살고 있었는데, 카메라가 3년 만에 한여진을 담은 느낌이었다.


혼자 ‘엄마 미소’로 웃었다. ‘드라마 ‘킹덤’ 연기력 논란으로 마음고생 많이 했구나. 그래, 배두나가 어떤 배우인지 다시 기억나게 해 줘!’.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한테 내가 찔렸다. 분명 ‘킹덤’을 두고 지인들과 설전을 벌이며 ‘어디가 어색해? 꼭 틀에 박힌 사극 톤으로 말해야 해? 배두나는 원래 자연스러운 연기, 다큐 같은 연기를 하는 배우야. 얼마나 추울 때 찍었는지 알아, 침이 얼 만큼 추워서 입도 잘 안 벌어질 때 찍었다잖아. 의상을 봐, 겹겹이 입지도 못하고 신발도 짚신인데 연기를 한 게 용하다’라고 옹호했으면서, 사실은 나도 평소보단 덜했다고 생각했던 건가. 배두나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배우 배두나와의 첫 만남부터 되짚어졌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 스틸컷 ⓒ시네마서비스 제공 영화 '플란다스의 개' 스틸컷 ⓒ시네마서비스 제공

배두나의 영화 데뷔작은 ‘링’이지만 마음을 두드린 건 ‘플란다스의 개’였다. 배우 이성재를 좋아해서 본 영화였는데 어라, 이 배우 누구지? 싶었다. 정말 우리 동네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아파트관리사무소 들어가면 있을 것 같은 박현남이었다. 박현남을 만나지 않았다면, ‘청춘’은 오로지 김래원을 보기 위한 영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연배우가 맘에 쏙 들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청춘’을 보며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면, 배우로서의 자존감이 얼마나 다부지면 저렇게 대담하게 연기할 수 있나, 배두나라는 배우 덕에 우리도 진짜 연애 같은 연애영화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배두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 순하면서도 엉뚱한, 내 친구 중 한 명 같은 태희를 보여줬고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다시 한번 다큐멘터리 속 인물 같은 영미를 사실적으로 연기했다.


새로운 얼굴, 새로운 연기의 배두나지만 독특한 작품만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 삶에 밝음과 어두움, 비극과 코미디가 공존하듯 배두나의 선택엔 주저가 없어 보였다. 갑자기 아이를 등에 업고 배구 선수 출신의 강력한 스매싱으로 유흥가를 휘젓는 금순이가 되는가 하면(영화 ‘굳세어라 금순아’), 뻗친 머리에 대역 없이 노래 부르며 밤무대 가수가 되기도 하고(드라마 ‘글로리아’), 한강에서 매점 하며 오징어 굽고 엉덩이 긁는 강두(송강호 분)의 여동생으로 집안에서는 유일하게 멀쩡한 정신으로 국가대표 양궁선수에 빛나는 남주가 되어 조카를 잡아간 한강 괴물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기도 했다(영화 ‘괴물’).


영화 '공기인형' 스틸컷 ⓒ오드AUD 제공 영화 '공기인형' 스틸컷 ⓒ오드AUD 제공

다양한 결의 작품 속에서 배우로서의 지평을 넓인 배두나는 활동 무대도 해외로 넓혔다. 그의 국제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감독은 일본의 야마시타 노부히로였다. 이후 ‘마을에 부는 산들 바람’, 첫 번째 ‘심야식당’을 연출하게 될 야마시타의 2006년 영화 ‘린다 린다 린다’에 배두나를 기용했다. 배두나가 연기한 교환학생 송이 밝아질수록 영화의 유쾌함도 더했다. 그래도 이때는 한국인이었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에서는 일본어를 썼다. 일본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공기로 채워진 인형이니까.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두고 쓸 만큼 배우 배두나를 잘 알아서인지,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감독이 그린 국적도 불분명하고 사람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노조미의 정체성이 배우 배두나와 닮아있다. 어느 나라 영화에 등장해도 굳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 출신인지 밝히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사람인지 클론인지 특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매력이 배두나에게 있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스틸컷 ⓒNEW 제공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스틸컷 ⓒNEW 제공

그런 탈 국가적, 범 존재적 매력을 십분 활용한 게 릴리·라나 워쇼스키다. 500년 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SF 대서사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복제인간 손미-451 역은 배두나의 미국 등용문이 되었다. 큰 키에 뼈에 피부를 입힌 듯한 체형이 미덕이 되고 초점 없는 눈빛에 무표정이 빛을 발했다. 워쇼스키 자매는 다시 한번 영화 밀라 쿠니스, 채닝 테이텀 주연의 ‘주피터 어센딩’에 배두나를 조연으로 캐스팅했다. 이후 ‘센스8’이라는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만들면서 배두나를 박선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으로, 주연으로 기용했다. 서울,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멕시코시티, 런던, 베를린, 나이로비, 뭄바이를 배경으로 세계 8개 도시에 떨어져 살지만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서로의 생각과 감정, 능력을 공유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다. ‘센세이트’라 불리는 이들이 세계 안보에 위협이 될 거라 생각, 감금·연구하는 반센세이트 집단 BPO에 맞서 싸운다. 배두나가 아니었다면 도쿄가 됐을 배경이 서울이 됐다.


미국드라마 '센스'8 ⓒ출처=넷플릭스 홈페이지 미국드라마 '센스'8 ⓒ출처=넷플릭스 홈페이지

‘센스8’은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시즌 2로 마무리되었는데, 여기서 배두나는 태권도와 복싱에 능한 박선을 실감 나게 연기했다. 샌드백을 쳐도 제대로 치고 발차기를 해도 멋이 날 만큼 지독하게 준비했다. 그런 연습벌레가 오늘의 배두나를 있게 했고, ‘센스8’의 출연 분량을 키웠다. 배두나는 일본과 미국 사이 우리나라에서 영화 ‘코리아’를 촬영할 때도 전직 탁구선수인가 싶을 정도로 북한 국가대표 리분희를 맡아 열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만난 배두나에게서는 “나 한류스타야” “나 할리우드 배우야” 식의 태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어디에서 작업하든 배우로서의 일은 다 같은 것이라며 겸손했다. 이후 한국에 온 해외 감독들과 배우들은 배두나의 당당함에 관해 얘기했다. 주눅 들지 않고 늘 봐왔던 것처럼 친근하게 대하고, 일은 프로답게 한다며 매력이 많은 배우라고 극찬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나, 안에서는 겸손하고 밖에서는 당당한 배두나의 매너가 좋았다.


영화 '터널' 스틸컷 ⓒ㈜쇼박스 제공 영화 '터널' 스틸컷 ⓒ㈜쇼박스 제공

영화 ‘터널’의 촬영을 앞두고 한 음식점에서 약속 없이, 아주 잠시 만났던 기억이 있다.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인터뷰의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배우와 기자 사이. 배우는 상대가 민망하지 않게 목례를 건넸고, 주책맞은 기자는 어딘가 생각이 깊어 보이는 배우에게 이유를 물었다. 무너진 터널에 갇힌 남편을 구조하기 위해 이제 아무도 애쓰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어떻게 아내가 통보하는지, 정수(하정우 분)에게 세현이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어렵다는 배우에게. 우리가 이제 당신을 포기한다는 통보를 전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내여야 한다고, 그게 터널 안에 갇힌 사람에 대한 세상의 마지막 예의라고 강하게 말했다. 사실 기자도 정답을 몰랐지만, 기혼자임을 핑계 삼아 배우를 안심시켰다. 김성훈 감독의 시나리오를 향한 믿음에 바탕을 둔 주장이었다. 배두나는 고맙다며 웃었다.


사실 배우의 마음엔 이미 답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확신이 필요했을 뿐. 그러한 사실은 영화를 통해 더욱 확실해졌다. ‘터널’을 보며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마음을 무너뜨린 건 배두나였다. 라디오를 통해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보다 한참 전, 숫기도 없으면서 남편의 구조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달걀프라이로 고마움과 지치지 말고 계속해 달라는 부탁을 전하는 세현, 그런 세현을 박대하는 구조현장, 그래도 다시 일어나는 세현을 보며 뜨거운 눈물이 터졌다.


배우가 영화의 진심, 캐릭터의 진심을 전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고 무엇이 정답이라고 특정할 수도 없다. 배두나의 방법은 그저 그 인물의 심정이 되는 것. 억지로 동화한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가슴으로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방법은 선한 심성이 선행돼야 가능하다. 마음의 밭이 선해야 타인의 감정에, 살아있지 않은 캐릭터의 감정에 나의 감정을 ‘같게’ 할 수 있다


맑은 웃음이 아름다운 배우 배두나 ⓒtvN 제공 맑은 웃음이 아름다운 배우 배두나 ⓒtvN 제공

처음으로 돌아가 ‘비밀의 숲’ 속 한여진의 리듬감 있는 몸짓과 말투가 의미 있는 것은 배우 배두나가 캐릭터에 ‘진심으로’ 동화해 있기 때문이다. 황시목 검사(조승우 분)에 버금가게 똑똑하고 최빛 단장(전혜진 분)만큼이나 카리스마 있지만 서동재 검사(이준혁 분)를 비롯해 그 어느 캐릭터보다 인간미 있는 한여진이 가능한 이유다. 시즌1보다 대사가 더 줄었어도 무게감과 마력이 여전한 조승우와 검경 수사권 조정을 놓고 팽팽하게 대치하는 투톱이 가능한 이유기도 하다. 무조건적 대립 관계가 아니라 공식적 대치와 사적 협업의 묘미를 배가시킨 배두나의 호연, 아직도 나흘이나 기다려야 한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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