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YS·DJ와 '40대 기수론'서 보수의 후견인까지

전형민 기자

입력 2016.02.27 14:37  수정 2016.02.27 14:41

사사오입 반대-3·15 부정선거 반대-5·16 부당…'뼈'야당

자유민주총연맹 총재로 정통보수 인사이자 우파의 원로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이 23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과 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데일리안

27일 오전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는 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이끌었던 한국야당사의 핵심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이 전 총재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전주고와 고려대(당시 보성전문학교) 법대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는 일본인 선생을 내동댕이쳤을 만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해방 직후 1946년에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의 위원장을 지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북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이 전 총재는 같은 해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당시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기도 했고, 1960년에는 3·15 부정 선거 규탄, 1961년 5·16 군사정번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등 우리 근현대사에서 젊은 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이 전 총재는 이른바 '40대 기수론'에 동참했던 한 사람으로 '40대 기수론'이란 '젊고 유능한 정치가'들이 정치건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총재 등 당시 젊은 야당의 지도자들이 정치권에 우뚝 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70년에는 신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경선에 고 김영삼·김대중 대통령과 야당 대통령 후보 경쟁을 펼쳤다. 이 때 대통령 후보로는 최종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출됐으나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다.

1972년에는 유신 이후 반독재 투쟁을 주장한 윤보선 전 대통령, 양김(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반목하며 '중도통합론'을 주창해 야권으로부터 '박정희 정권에 협조하는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난해 11월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 빈소에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이 헌화하고 있다. (자료사진) ⓒ사진공동취재단

1976년에는 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가 집권했을 땐 정치활동 규제에 발이 묶여 11대 국회에 참여하지 못하기도 했다. 1985년 규제가 풀리면서 12대 총선에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당시 여당인 민정당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해 야권의 반발을 사며 논란이 됐다.

이를 계기로 양김 세력은 신민당에서 뛰쳐나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고 이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이듬해인 1988년 4월26일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고향인 전북 전주에서 신한민주당으로 출마했으나, 당시 호남을 휩쓸었던 DJ돌품에 밀려 낙선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 전 총재는 정계 은퇴 후에도 각종 우익운동과 반북·반공운동에 앞장서서 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등에 선출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자유민주총연맹 총재직을 역임해 정통보수파 인사이자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해 한 때 야당 대통령 후보 경쟁자였던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으로 활동했다.

1995년엔 한국노년유권자연맹 고문, 1996년에는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997년 11월21일 서울역광장에서 민족진영애국단체연합 등 범 우파단체를 소집, 민족진영구국안보총궐기대회를 주관했다. 1998년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에 선임됐다.

한편 사촌으로는 현재 19대 국회 새누리당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의원인 이헌승 의원이 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전형민 기자 (verdant@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